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데, 거기서 빨리 도망치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는 충고 사이에서.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사무직이 적성에 안맞는건지 고민중인 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신경도 못 쓰고 있었는데 거의 10주 정도 출장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구요.
다 합치면 180만원 정도 되던데, 알고 보니 사업비가 떨어져서 지출이 안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네...뭐...돈 안받고 일해도 괜찮다고 말 하면 거짓말 이지만, 어차피 출장비고,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어차피 해결하지 않으면 부서 업무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었으니 손해를 좀 봐 달라고 하면 까짓거 '내가 사업비 관리를 잘 못 했네. 전자결제를 사용 하면서도 자동으로 예산확인이 안되는 직장은 처음이라 신경쓰지 못했구나. 다음부터는 남은 예산을 출납팀에 확인해 가면서 출장을 신청해야 겠다. 배웠다.'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쩔 수 없이 돈을 못준다고 하면, 그냥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 하고 절차적으로 문제 없이 사업이 종료될 수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로 아쉬운 소리 하면서 누가 무슨 뭘 해줘야 하느니 마느니로 한시간 넘게 골 싸매고 침 튀기면서 다투고는 아무튼 결론은 처음과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는걸 보니 만정이 떨어집니다. 그 와중에 감사하게도 팀장님께서는 제 출장비를 지출해 주시려고 하십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논의하고, 협조하고, 격려하고, 책임지는 구조가 너무 비효율적이라서 업무 말고 다른데 신경쓰는 시간이 너무 많은데, 정작 핵심업무의 성과를 높일만 한 자원은 또 인적으로도 물적으로도 충원될 기미가 없고 모두들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맥놓고 있는게 마음이 안좋습니다.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지극히 적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순간 좋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어떤 업무든 제자리를 지켜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것이 직장생활의 첩경이며,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 하는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수행이며 완성으로 향하는 길이라는걸 여러 책들을 통해 배우곤 합니다. 요즘처럼 경기가 얼어붙는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겠죠. 그저 자아를 탐색하는데 시간을 더 들이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는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직업이든,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그것이 생업이 되는 순간, 특히 회사를 통해 여러 사람과 업무를 함께해야 하는 일이 되는 순간, 20%의 핵심적 성과를 위해 80%의 지리멸렬한 과정과 시간과 무의미함과 허무함을 견뎌내는 과정임을 여러 어른들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곤 합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더 견디기가 힘들어 집니다. 따뜻한 방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는 주제에 흰소리 하지 말고 월급루팡 궁리나 열심히 하라고 하면 또 그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참...마음이 자꾸 안좋습니다.
애써도 나아지질 가능성이 없는 구조라고 모두들 이야기 하는데, 그렇다면 문제되지 않게 관리만 하려고 하면 사업이 망할텐데, 경영진에서는 자원은 보충하지 않으면서 성과를 내길 원하는데, 사실 그 경영진 조차도 오너는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결단할 수 있는건 또 아니라서 관리자들에게 업무부담을 지우는데, 덕분에 관리자들은 업무효율을 떨어지면서도 갈려나가기는 또 엄청 갈려나가는데, 실무자들은 무력하게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이건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생활인가요? 모두들 이런식으면 어떻게 다들 조직과 사회를 발전시켜 온 걸까요?
어차피 하루에 12시간, 16시간씩 직장에 매달려 있는건 똑같은데, 그냥 땀흘린 만큼 정직하게 돈을 받을 수 있는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직장을 찾는게 더 나은 일인지 고민 중입니다. 어떤 조언을 들어보면 인생의 두번째 기회란건 지극히 희귀한 아웃라이어에게만 허락되는 일이므로, 한국사회에서 펜대를 놓는 순간 남은 평생을 위험한 직업환경에 노출되어 두번다시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단에서 손가락 짤리고도 다른 직업을 찾아해매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돈을 많이 줘도 현장에 나가는건 나쁜 선택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어차피 이제 30대 후반이고, 계약직을 10년 가까이 전전하는 동안 점차적으로 안정적인 삶에서 멀어지는건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차라리 같은 시간을 사용해서 현금채굴이라도 빡세게 해야하는거 아니냐는 충고도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이 나이에 가정을 일구고 단란한 삶을 살아가는건 이미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고, 독거노인으로 늙어갈 때 노숙자 보호소가 아니라 간병로봇이라도 임대할 수 있도록 현금을 모아놓는걸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걸까 싶기도 합니다.
인생의 전반적 목표와 내 눈앞의 방향성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고 밀어붙이고 버텨네는게 진정한 어른이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제대로된 사냥감은 못 찾고, 자기 꼬리를 쫓아서 빙빙도는 들개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는 말을 쏟아낸 글이라 마무리 하는게 어렵네요.
여러모로 이상한 날씨입니다. 다들 감기조심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