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스토리) 장희빈 남편말고 절대군주 숙종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肅宗, 1661~1720)은 34세에 즉위하여 46년 동안 재위하며 조선 후기 절대왕권의 정점을 이룬 군주였습니다. 그는 혈통적 정통성을 분명히 이어받았고, 또 특유의 성격과 정치적 감각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남긴 정치 운영 방식은 조선의 후세에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습니다.
숙종의 정통성은 명확했습니다. 그는 현종의 아들이자 인조의 증손으로, 인조반정 이후 이어진 반정 가문 계보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정치 혼란을 수습하며 새 왕조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 사건이었고, 인조 이후 효종·현종을 거쳐 숙종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정통 군주 혈통’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숙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신하들 사이에서 그 권위를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숙종의 왕권이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혈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붕당 정치를 능숙히 활용하며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이른바 ‘환국 정치’라 불린 방식은 특정 붕당이 지나치게 강성해질 때마다 숙종이 직접 칼을 빼 들어 숙청하고, 다른 붕당을 등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남인으로, 이후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기울어지는 반복 속에서 숙종은 조정의 권력 균형을 언제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파는 끊임없이 숙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왕권은 그만큼 공고해졌습니다.
그의 성격은 강단과 결단력, 때로는 냉혹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인현왕후 폐출과 장희빈 책봉, 그리고 다시 인현왕후 복위와 장희빈의 사사 사건은 숙종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감정적인 듯 보이는 그의 결정은 사실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었습니다. 후궁 문제와 왕비 책봉은 단순한 사생활이 아니라 신하들의 정치적 세력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숙종은 이를 과감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한편으로 군주의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결정이 모호하게 섞여 있다는 비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인 모습에서도 숙종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예와 학문에도 관심이 깊었고, 국가 운영에 있어 경제와 군사 개혁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상평통보 유통 확대를 통해 조선 사회에 화폐 경제 기반을 마련했고, 군제 개편을 통해 국방 체제를 다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신하들에게 냉혹할 정도로 가차 없었고, 정치적 희생양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의 공적은 크게 네 가지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환국 정치로 왕권을 확립하여 당쟁 속에서도 군주의 최종 결정권을 강화한 점입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조선의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둘째, 상평통보 유통 확대와 전황 개혁을 통해 화폐 경제를 활성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시장 교역이 활발해지고 민간 경제 활동이 한층 성장했습니다. 셋째, 금위영 설치 등 군제 개편을 통해 국방 체제를 재정비했습니다. 북방의 여진족 세력과 남해의 해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도 그의 치적입니다. 넷째, 과학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역법 개정과 학문적 후원을 이어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문물의 발전에 간접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실 역시 뚜렷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환국 정치의 부작용이었습니다.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반복한 당파 교체는 신하들에게 ‘정치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충성 경쟁을 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오히려 당쟁을 장기적으로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장희빈 사건에서 보이듯, 왕비 책봉과 후궁 문제를 정치 도구로 삼음으로써 조정이 사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휘말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숙종의 통치는 왕권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조선 사회의 정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결국 숙종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가장 입체적인 군주 중 하나로 남습니다. 그는 혈통의 정통성과 탁월한 정치 감각, 그리고 개인적 성격이 결합된 강력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방식은 후대 조선의 정치적 난맥상을 심화시키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숙종의 삶과 통치는 오늘날에도 권력의 성격, 리더십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