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10년 서사 속에 끼어든 빌런이었을까
그 사람에게 20대란, 곧 전 여자친구였다.
첫사랑이자 첫 연애.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인생의 3분의 1을 한 여자와 공유한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연애는 시작부터 셋이 하는 기분이었다.
"어, 지영아... 아, 미안."
운전석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그 이름.
내 이름이 아닌 낯선 여자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습관처럼 흘러나왔을 때,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당황하며 내 손을 잡았지만, 나는 직감했다. 그의 혀끝에는 아직도 10년의 인이 박혀 있다는 것을.
비단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주말에 찾아간 강릉의 맛집, 벚꽃이 예쁘다며 데려간 산책로.
"여기 짬뽕 순두부가 기가 막혀."
그는 내게 새로운 곳을 소개해주듯 들떠서 말했지만, 익숙하게 길을 찾고 사장님과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비참해졌다.
이건 새로운 추억을 쌓는 게 아니다.
그저 그 여자가 비워둔 자리에 나를 앉혀놓고, 지난 추억을 덮어쓰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폭발한 건 그의 자취방에서였다. 옷장 구석, 깊숙이 박혀 있던 낡은 상자.
그 안에는 그 여자가 쓴 편지와 둘이 찍은 스티커 사진, 커플 아이템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어? 아직도 미련이 남았어?"
내 고함에 그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뺏기는 아이처럼 망설였다. 그 찰나의 머뭇거림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내가 악를 쓰고 난리를 쳐서야 그는 마지못해 그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그의 등은 처량했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두 사람이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 건너서 들은 바로는, 여자 쪽 부모님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집안이 기울면서 현실적인 문제로 그를 놓아준 거라 했다.
'사랑하지만 헤어진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 비극적인 서사의 주인공이 그들이었고, 나는 그 애절한 드라마가 잠시 쉬는 시간에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해야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결국 그 껍데기뿐인 다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딱 한 달이 지난 오늘. 친구가 조심스럽게 전해준 소식에 나는 헛웃음이 터졌다.
"걔네... 다시 만난대."
그새 집안 사정이 해결된 건지, 아니면 현실을 무시할 만큼 사랑이 컸던 건지.
그들은 다시 10년의 역사 뒤에 +1일을 더하기 시작했다.
나와 치고받고 싸우며 억지로 물건을 버리게 했던 그 시간들은, 그들의 재결합을 위한 애틋한 시련 정도가 되었을까.
마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눈치 없고 표독스러운 조연이 된 기분.
어차피 돌아갈 곳은 거기였나 보다.
기분이 참 더럽다.
부디 내 욕이라도 실컷 하면서, 그 지겨운 세기의 사랑 잘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