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특별한 구석은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책 읽는 건 좋아하는 편이라는 정도일 것 같다.
어릴 적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부모님은 각자 일터와 학교로 나가셨고, 세 살 위 형은 친구들과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던 날들에 자연스럽게 손이 간 것은 책장이었다. 삼성당 세계위인전, 이야기 한국사 같은 전집들. 심심해서 펼쳤지만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다음 권을 꺼냈고, 그렇게 몇 번씩 반복해 읽었다. 지금도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들은 대부분 그때 읽은 내용들이다.
전집을 여러 번 읽다 보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진다. 그때부터는 아버지의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만, 유독 또렷한 장면이 하나 있다. 한여름 오후, 나무 목침을 베고 누워 월간 『신동아』를 읽고 계시던 모습이다. 어떤 날은 서당 훈장과 아이들이 그려진 교보문고 포장지의 책을 읽고 계셨다. 그때의 아버지는 조용했고, 편안해 보였다. 바쁜 회사원의 모습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집에는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에서 받아 오신 책들도 적지 않았다. 단행본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배포되던 회사 자료들도 있었다. 1980년대에는 일본 기업의 성공담을 다룬 책들이 유행이었다. 전후의 어려움을 견디며 사업을 일으킨 경영자들 이야기,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 “강자 생존이다, 다시 도전해라”라는 제목의 책에서 읽었던 한 대목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처럼, 사소한 장면으로 태도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 회사에서 주간마다 나오던 Business Intelligence 자료와 월간 사보다. 솔직히 말하면 내용은 어렵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고, 들쑥날쑥했다. 경제 지표나 해외 시장 동향 같은 부분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직원 인터뷰나 해외 공장 이야기 같은 꼭지는 그나마 흥미롭게 읽혔다. 읽을 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빠지지 않고 펼쳐 보았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기업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세상이 어떤 언어로 설명되는지 조금씩 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교적 재미 있었던 책도 있었다. 당시에는 해외 주재원이나 외교관이 아니면 알기 어려웠던 내용이 담긴 박권상의 『영국을 생각한다』였다. 특파원으로서의 영국 생활을 다룬 책이었다. 한 권은 정치와 경제 이야기가 중심이었고, 다른 한 권은 가족과 함께한 생활 이야기가 많았다. 먹는 것, 입는 것, 쇼핑하는 방식, 정원을 가꾸는 문화 같은 일상의 이야기들이 특히 흥미로웠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었다.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도, 태블릿도 없었다. 집 안에 있는 종이책과 신문이 읽을 거리의 대부분이었다. 읽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반복해서 읽은 시간들이 내 안에 조용히 쌓였던 것 같다. 겉으로는 조용한 아이였지만,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하루 종일 휴대전화와 태블릿을 들여다본다. 화면 속에는 늘 새로운 것들이 올라온다. 지루할 틈은 없어 보인다. 대신 오래 붙들고 있는 시간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속에서 어떤 내면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나를 만든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혼자 있던 시간과 집 안에 늘 놓여 있던 책들, 그리고 조용히 책을 읽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고민할 때, 정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이런 생각은 든다. 집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어른 한 사람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읽어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냥 읽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그리고 가끔, 나무 목침을 베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