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 하던 놈의 비참한 근황
저는 좀 비뚤어진 놈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찢어진 옷 입고 흙바닥 뒹굴면서도 제가 가난한 줄 몰랐습니다. 그냥 그게 재밌었거든요. 머리는 타고났는지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그림도 좀 그렸습니다. 고등학교 땐 미술 선생님이 사비로 입시 학원을 끊어줄 테니 제발 미대 가자고 매달리셨죠. 공부랑 그림 다 되니 명문대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요. 근데 저는 "그림을 업으로 삼기 싫다"며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인 길을 저는 발로 찼습니다.
고등학교 땐 더 가관이었죠. 학교에 수업도 없는 물리2를 선택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학원 다니는 애들 진도 따라가기도 벅찬데, 공통물리 선생님도 모르는 문제를 들고 가서 괴롭히는 괴짜였죠. 전교 1등으로 입학했던 성적은 반에서 7~8등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엄마는 미술 선생님 해서 편하게 좀 살라고 울며 사정하셨지만 저는 이과 고집을 못 버렸습니다.
어찌어찌 명문대 공대에 갔고, 동기 90%가 대기업에 갔습니다. 근데 저는 또 그게 싫더군요. 남들 다 가는 길은 죽어도 가기 싫은 그 병이 다시 도진 겁니다. 결국 저는 친구들 초봉의 절반 정도 받는, 스타트업 초기 멤버로 들어왔습니다. 그냥 공고가 마음에 들어서요. 야근 수당도 없는 포괄인데도 매일 밤새서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고, 그러면서 대표님의 신임을 받고 우당탕탕 해왔지만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진짜 재밌는 걸 하고 있는 게 맞나? 지금 재밌나? 이게 정말 나한테 맞는 옷인가? 이걸 위해서 내가 그 편한 길들을 포기한 건가? 요즘따라 그림이 그리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선생님하면서 작품활동 했으면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전공 살려 대기업 갔으면 더 재밌게, 더 유능하게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두배 차이나던 연봉은 이제 세배 네배까지 차이가 나겠죠. 사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이제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 아쉽고, 사실은 두려움이 생긴 것 같습니다. 흙바닥에서 놀던 그때처럼 남들이랑 비교하지 않고 그냥 지금이 재밌는데 뭐! 하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데, 솔직히 지금은 제가 지금까지 해온 선택이 용기였는지 아니면 그저 치기 어린 고집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마치 마음대로 될 것만 같던, 아주 오만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내가 선택한 길이 막다른 길은 아닐까 고민하는 40대... 저처럼 비뚤어지게 살다가 길을 잃어버린 분들 혹시 계실까요? 리멤버에는 탄탄대로를 걸어오신 분들만 계시는 것 같아서 과연 어떨까 궁금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