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이코노미) 왜 지금 다시 일본을 공부해야하는가?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르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지리적 근접성과 역사적 얽힘 속에서 우리는 종종 일본을 거울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결코 같지 않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을 연구해야 합니다. 일본이 이미 먼저 겪은 사회 변화와 경제적 굴곡, 인구 구조의 충격, 산업 재편의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입니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장기간 저출산과 고령화로 사회 전반이 느려지고, 지방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고령층의 자산은 두텁지만, 젊은 층의 소비·투자 여력은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경제의 리듬 자체가 장기 침체에 들어갔습니다. 한국 역시 인구 감소의 파고를 맞이하고 있으나, 일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좁은 국토와 수도권 초집중 체제로 인해 인구가 빠르게 줄더라도 수도권의 밀도와 혁신 에너지가 유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집중이 과도하면, 충격이 닥쳤을 때 한꺼번에 흔들릴 위험도 큽니다. 따라서 일본의 지방 소멸을 반면교사 삼되, 한국식 분산 전략과 이민·유학생 정착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동산과 금융 문제 역시 두 나라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일본은 버블이 터진 뒤 기업과 금융권의 부실을 장기간 끌어안으며 디플레이션 심리가 굳어졌습니다. 반면 한국은 가계가 높은 레버리지를 지고 있고, 주택이 단순한 생활재가 아니라 노후·자산축적·사회적 위상의 핵심 수단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장기 침체 속에 기대가 낮아져 변화가 더뎠다면, 한국은 기대의 방향 전환이 극단적으로 빠르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금리·세제·공급 신호에 따라 시장의 흐름이 급변하고, 이 과정에서 가계·기업·정부 모두가 동시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처럼 느리게 가라앉기보다는, 빠른 사이클 속에서 변동성이 증폭되는 길을 걸을 가능성이 큽니다.
산업 구조와 기업 문화에서도 흥미로운 대비가 드러납니다. 일본은 정밀 제조, 소부장, 장치 산업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지켜왔지만,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시대에는 뒤처졌습니다. 안정과 장인정신이라는 장점이 동시에 의사결정의 더딤이라는 한계로 작용했습니다. 한국은 다릅니다.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거대 설비 산업에서 기민하게 피벗해왔고, 글로벌 OEM 전략과 국가 단위의 동원 능력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매출 비중은 여전히 취약합니다. 결국 한국이 일본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기존 하드웨어 초격차 위에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지식재산 생태계를 겹쳐 놓는 데 있습니다. 일본의 실패는 곧 한국이 보완해야 할 교훈이 됩니다.
정치와 정책의 리듬도 다릅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성이 높지만, 전환 속도가 더딥니다. 반면 한국은 교체 주기마다 정책의 진폭이 커지지만,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이 빠른 추진력이 산업 전환에는 강점이지만, 예측 가능성을 약화시켜 불확실성 비용을 키운다는 점에서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이 보여준 장기적 예측 가능성과 한국의 추진력을 절충하는 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문화와 콘텐츠에서도 두 나라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일본은 장기 침체 속에서도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산업을 바탕으로 소프트파워를 유지했습니다. 깊이 있는 팬덤과 누적된 IP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은 한류의 폭발적 확산으로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지만, 히트작 중심의 구조와 제작 자금의 불안정성이 리스크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장기 IP 누적 모델은 한국이 반드시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기술 전환과 미래 산업의 관점에서도 일본과 한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일본은 정밀공학, 로봇, 의료·케어 산업에서 깊이를 쌓아왔고, 이는 고령화 사회에 걸맞은 산업 기반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반도체·배터리·통신이라는 세계적 스택 위에 AI, 바이오, 에너지 전환을 얹을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빠른 고령화는 위기이면서도 디지털 헬스, 바이오 제조, 원격의료 같은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일본의 케어 산업 경험은 참고할 가치가 있고, 한국은 이를 기술 융합과 글로벌 시장 확장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사회심리와 제도적 장치도 비교할 만합니다. 일본은 안정 추구 성향이 강하고 실패에 대한 비용이 크기 때문에 창업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한국은 안정과 기회를 동시에 추구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기회가 열리면 집단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역동성이 존재하지만, 실패를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장치는 약합니다. 따라서 한국이 일본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재도전이 가능한 금융·세제·법적 환경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회에 반응하는 한국인의 집단적 에너지가 충분히 발휘되려면, 실패를 흡수하는 장치가 필수적입니다.
결국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경고음입니다. 인구 감소, 부동산 거품, 산업 전환 지체, 사회적 보수성 같은 문제는 언제든 한국에도 올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참고서입니다. 일본이 이미 겪은 시행착오 속에서, 한국이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빠르고 밀도 높은 사회입니다. 이 장점을 살려 속도와 추진력을 발휘하되, 일본이 보여준 예측 가능성과 장기적 제도 설계를 일부 이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동성의 파도를 기회로 바꾸고, 저성장의 바닥을 높이면서 다음 고점을 새롭게 그릴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라는 말은 단순한 자부심이 아니라 전략적 선언이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기 위해, 일본을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역설 속에서, 한국의 미래는 새로운 궤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