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라임오렌지 나무
너의 라임오렌지 나무
매입한 중고 서적을 분류하는 일은 타인의 지나간 계절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책장 사이에 끼어 있는 말라비틀어진 단풍잎, 영수증 쪼가리, 그리고 주인의 성정을 닮은 밑줄들. 그러나 그날 재고 정리대 위로 올라온 빛바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조금 다른 종류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표지를 펼치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잉크가 살짝 번진 손글씨였다.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을 다해 그린 남자의 얼굴.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나직한 고백.
> *‘누나, 처음이 가장 소중한 거래. 두 번째는 아무 가치도 없는 거고.’*
>
작품 속 제제의 대사를 빌려 적은 문장이었다. 문맥을 짚어보지 않아도 선연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소년이 생애 처음으로 품었던 비대칭의 감정, 결코 가닿지 못할 연상의 여자를 향해 바친 서툴고 순수한 첫사랑의 잔해라는 것을.
소년에게 이 책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용기 내어 건넨 자신의 가장 귀한 ‘처음’이자, 거절당할까 두려워 소설의 문장 뒤로 숨겨둔 위태로운 고백의 편지였으리라.
그러나 이 책이 지금 내 손, 즉 중고서점의 퀘퀘한 매대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랑의 결말을 잔인하도록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는 이 책을 팔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삿짐을 줄이다가 우연히 발견해 ‘이런 애도 있었지’라며 덤덤하게 중고 박스에 던져 넣었을까, 아니면 단돈 몇 천 원의 가치로 소년의 영원을 깔끔하게 처분해 버린 것일까. 소년이 온 우주를 바쳐 고백했던 그 ‘처음’은, 여자에게는 그저 지나간 수많은 계절 중 하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사랑은 이토록 무겁고 거대했는데, 여자의 정리는 이토록 가볍고 냉정하다. 이 지독한 무게의 불균형.
주인을 잃은 문장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책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누렇게 바랬지만, 그 속에 박제된 소년의 문장만큼은 여전히 처음 그날처럼 뜨겁게 서성이고 있었다. 돌려받지 못한 마음들이 갈 곳을 잃고 중고서점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여자는 떠났고 사랑은 끝났지만, 소년이 남긴 가장 소중한 ‘처음’은 여전히 이 낡은 책장 사이에 갇혀 누군가 자신을 읽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가장 쓸쓸하고, 가장 비대칭적인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