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정보 빼내려고 라이벌사(?) 잠입한 썰
옛날에 있었던 어이없지만 재밌었던 썰이 생각나서 글 써봅니다.
당시 저는 한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었는데, 일이 너무 재밌어서 딱히 이직할 생각은 없던 상태였어요. 그때 저의 관심은 오로지 채용 뿐. 팀에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하는데 도무지 핏이 맞는 사람이 안 오는 거예요. 뭐가 문제일까, 잡디가 문제일까, 채용 공고가 문제일까, 서면 인터뷰 항목이 문제일까 고민하다가, 벤치마킹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왜 그때까지 벤치마킹을 안했냐면... IT 업계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서비스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범위를 좀 넓혀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우리가 찾는 직무랑 가장 비슷한 일을 하는 분야가 뭘까 생각해보니 방송국 PD였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튜브가 대세일 때가 아니어서, 고퀄리티(?)의 PD를 뽑는 곳은 무조건 대형 방송사였거든요. KBS, MBC, SBS, EBS, CBS 등등. 그래서 거기는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뽑나 벤치마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공채 시즌이기도 했고요.
우선 자소서 항목부터 보는데, 생각보다 저희 회사 공고나 서면 인터뷰 내용이랑 크게 결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렇다면 핵심은 필기시험일텐데... 어떻게 나올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매년 필기 항목이 크게 달라지니까, 올해 필기를 봐야겠더라고요. 그리고 필기를 치려면 서류를 붙어야 하니까 나름 신경 써서 자소서를 적어 냈어요.
근데 어랍쇼. 진짜로 서류가 덜컥 붙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필기시험을 치러 갔는데, 시험 항목들이 솔직히 좀 애매하더라고요. 진짜 이걸로 사람을 걸러낼 수 있다고? 싶었지만 일단 열심히 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필기도 붙었더라고요. 이왜진...?
결국 면접까지 가게 됐습니다. 당시엔 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방송사 PD 채용이 빡셌기 때문에 이렇게 순탄하게 다 패스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면접 프로세스까지 벤치마킹하자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갔습니다.
렬루다가 잃을 게 없는 완벽한 백지 상태로 간 거라 긴장도 안 되고 떨지도 않아서 면접관들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답변을 잘 이어갔어요. 근데 면접관 한 분이 자소서 항목 하나는 왜 빼고 제출했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오잉? 무슨 말씀이신지... 어떤 항목인지 듣고 보니 답하기 좀 불편한 질문이어서 나중에 써야지 하고 비워놨다가 그대로 제출했던 거였어요. 아니 근데 왜 뽑으신 건지...? 아무튼 지금 여기서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냐고 하시는데, 너무 당황해서 원래라면 쿠션어를 섞어서 좋게 좋게 돌려 말했을 것을, 저도 모르게 필터 없이 완전 날것으로 세게 답변을 해버렸습니다.
말하는 순간 면접관 중 한 분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는 게 보였습니다. 아 저분이 그 프로그램 PD구나 싶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저의 완벽한 실책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너무 너무 죄송하네요...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나온 다음날, 별 생각없이 회사 동료들에게 채용 잠입 결과 공유한다면서 썰을 풀었더니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 놔두고 이직하려고 했었냐, 그래 큰회사가 가고싶더냐, 배신자네 배신자야 하면서 동네방네 소리치는 걸 진짜 벤치마킹이 목표였다고 설득하느라 땀 좀 뺐습니다. 사실 좀 이상하긴 하죠? 근데 뭐 저는 진짜 그랬어요. 뭐든 해봐야 아는 거잖아요.
근데 웃긴 건, 이게 그냥 운인 줄 알았거든요? 궁금해서 다른 방송사 두 곳도 잠입해서 시험을 봤는데, 거기도 다 면접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3연속으로 면접까지 가니까 어라 내가 어쩌면 방송국이 원하는 인재상?! 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1차 면접 다음부터는 진짜 준비한 사람들의 것일테니 2차 면접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리고 1차 면접까지는 그렇다할 소스를 얻지도 못하긴 했지만 재밌는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이걸 공유했을 때 난리난리치던 동료들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네요. 배신자라니. 그래도 세 개의 방송사 채용 벤치마킹 결과 ㅋㅋㅋ 우리 채용 프로세스가 그렇게 나빴던 것은 아님을 깨닫고, 존버하다가 좋은 팀원들을 셋이나 뽑게 되었답니다. 해피엔딩이죠?
그때 느꼈던 건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나와 잘 맞는 곳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때 다니던 스타트업도 딱 그랬거든요. 물론 빡세게 일하긴 했지만 엄청나게 공부를 하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생각한대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잘 정돈하고 일을 만들면 그만큼 성과가 나는 그런 곳이요. 그게 아닌 곳을 가면 아무리 빡세게 공부해도 그렇게 성과를 내진 못했을텐데 말이에요.
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걸 깨달아서 좋은 팀원들을 뽑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왜 이걸 이렇게밖에 답을 못하지'로 서면 인터뷰에서 괴에에엥장히 많은 사람을 걸러냈었는데, 처음부터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고 내가 의도한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가르쳐주면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 걸로 시선을 달리 하니까 괜찮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거죠.
그냥 그랬다는 거예요. 두서없지만 옛날 이야기가 생각나서, 면접 관련 썰들이 많이 올라오길래 한 번 끄적여봤습니다. 참고로 제가 진짜 PD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닌 건 지금까지도 그 흔한 유튜브 영상 하나 올려본 적이 없다는 게 증명합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그때의 동료들이 이걸 알아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