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아들이 만든 김치 드시겠습니까?
슈퍼네임드 친일파, 을미사변의 주범 우범석의 아들, 우장춘.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접니다.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 정도로 기억하시는 분이 많은데요, 사실 씨없는 수박을 우장춘 박사가 만든 건 아닙니다. 근데 그게 별로 안 중요할 만큼 진짜 업적이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 다른 업적들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글을 써봅니다.
1. 아버지는 을미사변의 주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는데,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을 궁궐로 안내하고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가담한 인물이에요. 사건 후 처벌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서 낳은 첫째 아들이 바로 우장춘입니다.
즉 우장춘은 태어날 때부터 조선을 팔아먹은 역적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달고 시작한 거예요. 심지어 아버지는 우장춘이 다섯 살 때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으러 온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합니다. 아버지 없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한테는 멸시받고, 매국노 자식이라는 이유로 또 손가락질받으며 자란 거죠.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유년기였습니다.
이 배경을 알아야 뒤에 나올 얘기가 더 묵직하게 다가와요.
2. 도쿄제국대학, 그리고 다윈도 몰랐던 것을 증명하다
가난 속에서도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 부설 농학 실과에 들어가 원예육종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세계 학계를 뒤집어놓는 논문을 씁니다. 제목은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
당시까지 진화론의 정설은 이거였어요. "같은 종끼리만 교배해야 자손을 남길 수 있고, 다른 종을 교배하면 자손을 못 낳으니 새로운 종이 나올 수 없다." 종은 아주 오랜 시간 자연선택을 통해서만 서서히 변한다는 게 다윈 이후 학계의 상식이었죠.
우장춘은 배추(B. campestris)와 양배추(B. oleracea)를 교배시켜서, 염색체 수가 배가되면(배수체화)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생식 능력을 가진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실험으로 증명해버립니다. 실제로 유채(B. napus)가 배추와 양배추의 자연 교잡종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고요. 이걸 "종의 합성"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유전학 교과서에 실리는 내용이에요. 배춧과 작물들의 이 게놈 관계를 삼각형으로 그린 걸 우장춘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이 논문으로 1936년, 조선인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여담이지만 그 전 해에는 논문을 완성해가던 농사시험장 본관에 불이 났는데 우장춘이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자료를 꺼내오려다 주변 사람들이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어요.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가죠.
실제로 이 "종의 합성" 이론은 지금까지도 십자화과 식물(배추, 유채, 양배추) 관련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논문이에요. 한국인의 이름이 붙은 과학 이론 중에는 이휘소 박사의 이론과 나란히 놓일 정도로, 해외 과학 교과서에 실제 이름과 이론이 함께 실린 몇 안 되는 사례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후대 평가 중에는 "그가 계속 일본에 남아 연구에만 전념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가능성도 컸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옵니다. 실제로 그의 생애를 다룬 여러 글에서 "독창적인 연구로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컸으나, 한국에서는 당장 시급한 채소 종자 개발에 힘을 쏟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식의 평가가 반복해서 등장하죠.
실력은 이 정도로 인정받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정작 승진은 막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키이 종묘 등에서 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해방을 맞습니다.
3. "아버지의 죄를 씻으려면 조국을 위해 일해라"
해방된 조국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어요. 국내 지식인들이 '우장춘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의 귀국을 추진합니다. 1950년 3월, 우장춘은 가족을 일본에 두고 혼자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독립운동가 김철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매국한 죄를 씻으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절대로 조선인의 성을 갈지 마시오." 이 말이 우장춘에게 깊이 박혔고, 두 사람은 우장춘이 세상을 뜰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부산 동래에 있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처우는 열악했습니다. 박봉에 인력도 부족하고 한국전쟁까지 겹쳐서 상황은 최악이었죠. 심지어 연구원들이 징집 대상이 되자 국방부와 씨름해서 "이 사람들이 있어야 군인들 먹을 식량이 나온다"고 설득해 간신히 면제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늘 낡은 고무신을 신고 다녀서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까지 붙었죠.
4. 그래서 우리가 지금 먹는 것들
우장춘의 진짜 업적은 지금 우리 밥상을 통째로 바꿔놓은 결과물들입니다.
- 배추 : 1950년대까지 한국 배추는 얇고 부실해서 김치 담그기도 애매한 수준이었어요. 우장춘 연구팀이 개발한 '원예 2호' 배추가 지금 우리가 아는 속이 꽉 찬 결구배추의 시작입니다. 이게 없었으면 지금의 김치 맛도 없었던 거죠. 이 배추 품종개량은 이후 과학기술 70선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 감귤 : 제주도가 감귤 산지가 된 것도 우장춘이 일본에서 귤나무를 도입해 제주 기후에 맞게 시험재배하고 재배를 권장한 결과입니다.
- 감자 : 병에 취약했던 강원도 감자를 무병 씨감자 개발과 시험재배로 개량해서 대관령이 감자 특산지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 무, 벼 등도 병충해 저항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품종개량에 매달렸고요.
그리고 그 유명한 씨없는 수박에 대해 말하자면, 우장춘은 그걸 만든 게 아니라 국내에 처음 들여와 시연한 사람입니다. 당시 농민들이 국내 개량종자를 안 믿고 일본 밀수 종자만 쓰려고 하니까, 새로운 육종 기술을 배우면 이런 신기한 것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충격요법으로 들고 나온 거였죠. 본인이 발명자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언론이 그렇게 대서특필하면서 와전된 겁니다. 오히려 이 오해 때문에 정작 배추, 감귤, 감자 같은 진짜 업적이 가려진 셈이니 좀 억울한 일이죠.
5. 마지막 순간
우장춘은 9년을 오로지 연구에만 쏟다가 1959년 만성 위궤양 악화로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61세. 죽기 직전 병상에서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고는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 라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지금 그의 묘소는 수원 옛 농촌진흥청 자리에 있습니다. 2003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요.
매국노의 아들로 태어나 어디에서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이 결국 자기 손으로 수천만 명의 밥상을 바꿔놓았습니다. 아버지의 죄를 자기가 대신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평생을 조국을 위한 연구에 갈아넣었다는 게 참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삶이죠. 혈통이나 태생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남겼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걸 우장춘의 인생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