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유명해졌을까?(뜻밖의 행운:Serendipity)"
때론 아주 우연한 행운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일들이 있죠. 우리가 잘 몰랐던 아인슈타인이 유명해진 이유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신념을 가지고 몰입하다 보면 인생을 바꿔놓는 Serendipity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면 버텨내야 합니다.(존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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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성공에 도달한 전형적인 사례다. 결국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손꼽히면서 우리 문화 속에 탁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 아인슈타인은 헝클어진 백발의 천재로 사랑받기 전, 대부분의 미국인은 아인슈타인을 ‘오만한 엘리트주의자’로 여겼다.
3. 아인슈타인은 1919년이 되어서야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첫 논문이 나오고 14년 후였다.
4. 그때 영국 학자들이 빛이 직선으로 이동하지 않고 굽어서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입증하는 계기였다. 영국 언론은 이 발견에 흥분했다.
5. 하지만 미국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상대성 이론에 6편을 할애한 뉴욕타임즈의 평론에는 의구심이 뒤섞여 있었고, 심지어는 적개심마저 보였다.
6. 아인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재앙을 일으킨 독일 출신 지식인이자 유대인이기도 했고, 당시 미국에는 유대인에 대한 깊은 반감과 외국인 혐오 정서가 팽배했다는 점도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7. (게다가) 1919년 잠깐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뒤 상대성 이론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몇 년 뒤 단 한 번의 운명적인 역전이 아니었다면,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반짝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8.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언제 천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을까? 알고 보니 그가 유명해진 정확한 날짜가 있었다. 바로, 1921년 4월 3일. 아인슈타인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날이다.
9.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는 논란의 대상인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들을 그가 도착하는 맨해튼 남쪽 배터리 파크로 보냈다.
10.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타고 올 증기선을 맞이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비단 기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어리둥절했다. 거의 2만 명의 군중이 모여 목이 터져라 환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 아인슈타인이 이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언론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일개 유대인 과학자의 미국 방문은 신문의 뒷면에나 실릴 수많은 단신 중 하나에 불과한 기삿거리였으니까.
12. 그러나 대규모 관중은 기자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언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거 큰 뉴스군"
13. 기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하면서 한 번 더 허를 찔렸다. 아인슈타인을 오만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던 기자들은 허름하고 소박한 옷차림에 바이올린에 대한 순진한 열정을 가진 남자를 만났으니까. 아인슈타인은 기자들에게 쑥스러워하며 인사를 했고, 주로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촌철살인의 명언들을 쏟아내 훌륭한 기삿거리를 제공했다.
14. 그다음 날 아인슈타인은 <워싱턴 포스트> 전면에 실렸다. 뉴욕타임즈도 전면에 아인슈타인을 다뤘다. 신문 기자의 논조가 갑자기 호의적으로 바뀐 것이다.
15. (이후) 아인슈타인은 동심을 가진 예술가이자 직관이 뛰어난 물리학자, 재치 있고 장난스러운 대화의 달인으로, 어딜 가든 유명 영화배우처럼 대우를 받았다.
16. 그런데 도대체 왜 2만여 명의 평범한 뉴욕 시민들은 직장에 휴가를 내면서까지 아인슈타인을 보러 간 것일까? 진실은 이렇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환영 인파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날 군중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환영하러 간 것이었다.
17. 그날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의 자격으로 뉴욕에 온 게 아니었다. 그는 국제 시온주의자 기구(international Zionist Organization) 회장인 ‘차임 와이즈먼'을 수행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왔을 뿐이었다.
18. 차임 와이즈먼은 수행단과 함께 미국을 방문해 당시 팔레스타인이었던 곳에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을 알리려고 했고, 이는 당시 뉴욕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19. 2만 명의 환영 인파는 ‘상대성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온주의의 영웅인 차임 와이즈먼을 맞이하러 나갔다. 이 사실은 유대인 신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20. (그런데 이를 몰랐던) 비유대계 주류 언론은 아인슈타인을 (전면에) 다루는 실수를 범했고, 이는 아인슈타인의 명성에 큰 기여를 하며 아인슈타인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1. 그날 이후, 아인슈타인은 유명 인사가 되었고 가는 곳마다 군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로서 얻은 전무후무한 명성은 그의 과학적 업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발적인 사건 덕분이었다.
22. 물론 아인슈타인이 뛰어난 과학자로서 이미 입지를 다졌고, 애초에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려고 애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증기선에 오른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연결망과 과학계 바깥의 핵심적 중심축과의 연결 고리와 명분이었다.
23. 하지만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의 성공 사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연결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포뮬러 : 성공의 공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