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중 만난 빌런들
출근길 빽빽한 만원 지하철, 덜컹거리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오늘은 또 어떤 사람 때문에 속을 끓여야 할까’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조여오고, 거절 한마디 못 해 남의 짐까지 묵묵히 짊어지다 결국 ‘만만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서글픔. 부당한 지시와 억지스러운 관행 앞에서도 "원래 다 이런 건가?" 자문하며, 홀로 자책으로 하루를 닫아왔을 수많은 밤들을 기억합니다.
저 역시 처음부터 단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첫 출근 날, 동의 한마디 없이 계열사 실적을 채운다며 경력 신고를 제멋대로 비틀어놓고는 "원래 다 그런 거다"라며 뻔뻔하게 대꾸하던 직원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피땀 흘려 현장에서 올린 매출을 두고 정작 월급날만 되면 빚쟁이 대하듯 유세를 떨던 회계팀,
사수의 묵인 아래 하청업체의 목을 죄는 견적서를 강요받아야 했던 씁쓸한 현장들, 겉으로는 상냥하게 전화를 끊자마자 허공에 괴성과 육두문자를 쏟아내며 사적 심부름을 일삼던 상사까지….
IMF 외환위기의 부도와 법정관리라는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그릇에 맞지도 않는 감투를 쓰고 비전문가의 칼을 휘두르던 이들, 70대 전문가라는 간판 뒤에 숨어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 후배에게 도면 한 장, 노하우 한 톨 내주지 않던 옹졸함,
입찰 서류만 쏙 빼먹고 입사 직전 연봉을 반토막 내던 비정한 B회사, 심지어 결혼 고민과 이직의 막막함을 함께 나누며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더니 발주처 앞에서 제 등을 밟고 올라서던 김대리 부하직원까지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역만리 모래바람 날리는 해외 현장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직원들의 한 끼 식대마저 쥐어짜며 깻잎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게 만들고, 밤새워 피땀으로 짜낸 평가 양식을 동료를 내쫓는 숙청의 도구로 악용하던 이단장 이른바 ‘끝판왕 빌런’까지 겪어내야 했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반평생의 일터는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자, 온갖 기이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비겁함과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정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풍파 속에서 저를 가장 무너뜨렸던 것은 살을 에는 과중한 업무도, 흙먼지 날리는 거친 현장의 피로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의 성실함과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는 뼈아픈 사실"이었습니다.
남을 배려하느라 제때 선을 긋지 못했고, 분란을 피하려다 상처를 혼자 삼켰으며, ‘관행’이라는 무책임한 거짓말 앞에 내 상식과 직업윤리를 먼저 의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글 같은 일터에서 숱하게 베이고 깨지며 반평생을 버텨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회사라는 곳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막연한 친절이나 맹목적인 참을성이 아니라는 것을요. 부조리 앞에서는 감정을 거두고 차분하게 시스템과 원칙으로 맞서는 법, 앞뒤가 다른 비겁한 이들에게 내 소중한 궤도를 내어주지 않는 단호한 ‘선 긋기’가 먼저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