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통근버스 (직장인을 위한 짧은 소설 하나)
"여보세요, 네 엄마"
"그게... 그러니까. 돈 좀 보내줄 수 있니?"
"얼마 전에 보내드렸잖아요... 또 필요하세요?"
"아니, 몸도 여기저기 쑤시고, 친구들이 해외여행도 가자는데..."
"아, 엄마. 저도 요즘 힘들어요. 그게..."
"됐다. 그래, 내가 주책이지. 내가 산다면 얼마나 산다고."
"아니, 그게 아니고요. 엄마. 제가 엄마 빚 다 갚아주느라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래도 난 너 아비 없이 자랐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네, 알겠어요. 얼마면 되나요?"
김 차장은 무기력하게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당장 아이들 학원비에, 집 대출금에, 여기저기 빠져나갈 돈들이 먼저 떠올랐다. 아버지 없이 자기를 키워 준 어머니에게는 감사한 마음이지만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돈을 보내도 힘들고, 보내지 않아도 힘들고. 망연자실하지만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하는 김 차장은 그렇게 통근 버스에 올랐다.
서대리는 아프다.
몸보다는 마음이 아프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다는 생각에. 인정받지 못하면 승진하지 못할 것이고, 승진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온몸의 세포를 휘감았다. '다른 동기들은 나보다 잘 나가는 것 같던데...' 의기소침한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 저 자신이 싫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서대리는 매일을 집과 회사로 서성였다.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정쩡하게 하루를 보내는 기분. 왜 사나 싶고, 무얼 위해 이러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몰려왔다. 슬럼프라 하기엔 증상이 너무 심하고, 기간이 너무 길었다. 끝이 없는 터널을 걷는 것처럼 서대리는 불안했다. 한 줄기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 주저앉고 싶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뛰어나갈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터벅터벅 통근 버스에 올랐다.
정 과장은 도망치듯 통근 버스에 올랐다.
늦게 낳은 아이가 출근하는 시간엔 더 보채곤 했다.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육아로부터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육아라는 의무 앞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듯했다. 그게 싫었다. 몸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존재가 희미해지는 참담함은 견디기 힘들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던지듯 맡기고는, 그래서 정 과장은 야근을 자처했다. 집에 가기가 두려웠다.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도 들었지만, 살고 싶었다. 호흡을 하고 싶었고, 심장의 박동을 느끼고 싶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온몸의 에너지와 온 맘의 영혼이 쪽쪽 빨리는 기분. 주말이 걸쳐 있는 출장이라도 생기면 정 과장은 날아갈 듯 기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텔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내는 것은 최고의 호사였다. 쇼핑도 필요 없었고, 맛집 방문도 귀찮았다. 그저 오롯이 저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가만히 누워 코로 숨 쉬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곤 했다.
강 부장은 외롭다.
모든 후배 사원들이 자신을 꺼린다는 걸 안다. 조직 책임자, 즉 리더라는 자리는 그렇게 허전하다. 상사들은 강 부장에게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주말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강 부장은 팀원들에게 메시지 보내는 걸 주저한다. 주말에 상사의 메시지를 받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자신이 밉지만, 결국 상사의 닦달과 당장 대답을 내어 놓으라는 압박에 팀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월요일 아침 뚱한 팀원들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주말에 메시지를 보내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그 '분'은 풀릴 리가 없다. 왜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는지 설명할 겨를도 주지 않는다. 그렇게 강 부장은 주말에도 메시지를 보내는 악덕 꼰대가 되고 만다. 점심시간이나 회식 때 자기 옆에 앉지 않으려는 직원들의 사투를 느낀다. 혹여나 자신이 출장을 가면, 팀원들끼리 그렇게 똘똘 뭉쳐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것도 강 부장은 안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살짝 넣어보고, 안쪽으로 굽은 어깨를 애써 펴보며 강 부장은 통근 버스를 탄다.
송기사는 오늘이 마지막 근무였다.
회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통근버스 노선을 감축한다고 하는데, 운이 없게도 송기사의 노선이 운행 중지가 된 것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통근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과는 정이 쌓인 터였다.
사거리 주유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남자는 항상 얼굴이 굳어 있었다. 길가 편의점 앞에서 타는 여성은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허겁지겁 버스에 올랐다. 배가 나온 나이 든 남자는 항상 풀이 죽어 있었다. 미러를 통해 힐끗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있었고, 누군가는 잠을 청하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송기사의 마음에 울컥한 게 올라왔다.
그게 무언 지는 송기사도 몰랐다. 그냥, 무언가가 올라와 가슴을 뛰게 했고 눈물이 핑 돌게 했으며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말 한 번 해보지 않았지만 그대로 정든 사람들과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였는지, 아니면 해가 쨍쨍한 날씨 탓이었는지. 안전벨트를 풀고는 일어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 잠시만요. 이 통근 버스는 바다로 갈 겁니다. 그냥 오늘 제 기분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리실 분은 지금 내려 주십시오!"
잠시 적막함이 흘렀다.
음악을 듣던 사람들은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부터 송기사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제 귀를 의심했다.
"저기, 아저씨 뭐라고 하셨어요?"
"이 버스, 회사로 안 가고 바다로 간다고 했습니다. 내리실 분은 지금 내리셔야 해요!"
적막함은 곧 깨졌다.
하지만 '바다'라는 단어에 홀렸는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누군가는 송기사가 느낀 가슴의 울컥함을 느꼈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고, 또 누군가는 메시지를 보냈다.
'저... 오늘 일이 있어 갑자기 휴가를 내야 할 것 같아요'라고.
"기사님, 그럼 가시죠! 우리, 바다로요!"
"네, 그럽시다. 그러하십시다!"
놀랍게도 그 버스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버스는 이미 서울을 벗어나 가평을 향했다. 강촌과 남춘천 IC를 지나 홍천, 인제, 양양을 거쳐 버스는 동해에 도착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회사나 상사로부터 허락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꼭 바다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왜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냥 마음이 향하는 대로. 기분이 그러한 대로. 영혼이 쏠리는 대로.
정해진 길을 가야 하는 통근버스가 그 경로를 이탈했을 때.
김 차장은 뭔지 모를 뜨거운 힘을 느꼈다. 서대리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용기를 내자고 다짐했고, 정 과장은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을 맛봤다. 강 부장은 외롭고 추웠던 마음이 갑자기 따뜻해짐을 느꼈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고 구두를 벗어 들고 모래사장을 달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통근버스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