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불행 프레임부터 벗어던지세요.
스스로를 행복하다 말할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왜 태어나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기분 좋은 것을 추구하고 그 끝엔 행복이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철학엔 '쾌락주의'라는 학파도 있습니다. 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이름은,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고 이것이 최고의 선(善)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쾌락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의 양과 질에 대한 이론을 내세우는 열심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현대에는 '주관적 안녕감'의 개념에 기반을 둔 여러 심리학 이론이 그 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행복하다 말할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인류의 시초부터 과거 철학자, 현대의 심리학자들도 사람의 행복에 대해 연구해왔지만, 행복은 근원이 추상적이고 주관적임과 동시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기 때문에 알아내려야 알아낼 수 없는 관념입니다. 내가 행복이라고 규정했던 것들도, 시간이 흘러 되돌아봤을 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또 언제에는 오히려 행복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행복은 순간이어서 잡아 놓을 수도 없고, 잡아 놓으려 하면 더 불행해지는 아이러니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스스로를 내세우는 직장인을 저는 거의(아예)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행복의 정도는 널뛰는 주파수와 같이 요동할 것이며, 그렇게 말하는 그 순간에도 내가 정말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저, 행복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지금 행복한 사람이라 말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는 행복에 가까워질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직장인은 왜,
불행의 아이콘이 되었나?
여기 한 존재가 있습니다.
당최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 우리네 직장인들입니다. 직장인이 왜 불행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말해보라면 아마도 수백 가지가 튀어나올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타의성' 때문입니다. 이 단어 안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출근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꾸역꾸역 일어나 나아가야 하며,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 웃음을 보여야 하는 일을 방학도 없이 매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
"무슨 일 있어? 요즘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아 보여?"
"어, 나 요즘 회사 다니잖아..."
출근하는 게 별거인 세상.
직장인의 애환을 희화화한 이야기들을 보고 처음엔 그저 웃었지만, 그건 직장인인 나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비웃는 것이란 걸 깨닫고 말았습니다. 퇴사가 사회적 콘텐츠가 된 것은 이 시대 직장인들의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여실하게 치환하여 보여줍니다. 먹고살만해진 시대에 행복의 기준은 높아져 가고, 일자리가 없어서도 힘들고, 일자리를 얻어도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행복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 시대 직장인들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회적 선고'를 이미 받아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직장인 불행론 프레임'에 갇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게 직장인의 애환이니까요. 우리는 마치 '오토 파일럿' 기능이 설정된 자동차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꾸역꾸역 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 길의 이름은 아마도 '직장인은 원래 이래, 불행해, 행복할 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토 파일럿이 작동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불행 프레임 속으로 속도를 내고 있는 것처럼요.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내 존재를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덜 불행하기부터 시작하기
이제는 우리에게 설정된 오토 파일럿 기능을 해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스템 안에서 자동으로 나아가는 그 항속은 편하고 안정적 일지 몰라도, 그 안에 '나'는 없습니다. '나'는 없이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그 상태. 그 편하고 안정적이란 느낌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착각이며 그것이 나를 책임져 주지도 않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은 자신이므로, 각자의 핸들을 직접 잡아야 한다.
저 또한 직장인으로서 매사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이겠죠. 또는, '진실'이 아닌 '주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직장인 불행 프레임'에선 빠져나올 수는 있다고 믿습니다. 당장 행복해지는 게 어렵다면, 우리는 최소한 덜 불행할 수는 있는 겁니다. 내 정체성은 직장인인데 이것을 부정하거나 직장인으로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나' 자신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직장인으로 행복하거나, 덜 불행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회사나 상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과정이자 지상 최대의 과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타의성'에 주목해야 하고, 그것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연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 직장인은 주인의식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머슴'이라 규정합니다. 회사는 주인. 나는 머슴. 그래서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들으면, 그에 맞는 월급을 주던가 대우를 해달라는 반발심이 먼저 앞서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반발심은 다시 한번 더 스스로를 머슴이라고 낙인 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제 저서인 <직장 내공>에서 '주인의식'을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내가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으로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즉, '주인'은 회사가 아닌 '나'라는 것. 오토 파일럿 기능을 해제하고 핸들을 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의'에 의해 꾸역꾸역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하게 됩니다.
동시에 '성장'의 기회와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타의성'에 의해 일하는 것은 '직업'을 수행하는 일이지만, '나'를 기반으로 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면 '업(業)'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업'은 직장생활이 끝난 그 어느 시점에서도 여전히 나를 지켜줄 큰 무기와 경쟁력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많은 후배들이 주위 선배들을 보며 퇴사 결심을 합니다.
"제 몇 년 후의 미래가 저 선배고, 팀장이고, 상무님 이잖아요. 미래가 안 보여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분명 있었습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우르르 토해져 나오는 사람들. 고만고만한 직책을 얻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하는 삶.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두 가지를 간과한 결입니다.
첫째, 오토 파일럿 즉, 직장인의 불행 프레임에 갇힌 생각이라는 것. 자기도 모른 채 그렇게 흘러가는 삶. 아니, 그렇게라도 흘러가면 다행일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단계까지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레 겁먹고 도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둘째,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보람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것. 아마도 그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기까지 무수한 노력을 했을 것이고, (나에겐) 뻔해 보이는 승진을 했더라도 (각자의 주관적) 행복을 느꼈을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남의 행복을 재단하거나 왈가왈부하고 있는 겁니다. 정작, 자신의 행복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우리는 우리 자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와, 직장인이라는 정체성. 영원하지 않을 '과정'으로서의 이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잘 정의하고 보듬어 갈 것인가.
직장인으로서 행복하지 못하면, 나의 행복도 없습니다.
행복할 자신이 없으면, 덜 불행할 수 있는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직장인 불행 프레임'에 스스로를 욱여넣지 말고, 조금씩 발을 빼내야 한다.
오토 파일럿 기능은, 버튼 하나로 쉽게 끌 수 있습니다.
오토 파일럿이 켜져 있다는 것을 먼저 인지할 수 있다면. 그 버튼이 어디 있는지만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