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는 정규직도 매년 계약을 갱신하나요?
안녕하세요. 주변에 여쭐 곳이 없다보니 염치없이 이곳에 도움을 청합니다.
현 직장은 국내기업이며 경력직으로 잘 자리잡고 다니고 있는 와중에 몇 달 전, 헤드헌터의 들쑤심으로 한 외국계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근무할 정규직 공고를 안내받았습니다. 히든 포지션이라 헤드헌터를 통해서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요, 국내 인지도나 한국 지사의 연혁 및 규모로는 매우 하찮아 보였지만 본사는 제법 오래된 기업으로 워라밸과 해당 업계에서의 글로벌 인지도가 꽤 좋은 곳이라고 헤드헌터에게 전해들었습니다.
JD를 쭉 살펴보니 학력 조건을 포함해 현직무와 거의 오버랩되고 제가 우대받을 수 있는 직무였기에 경력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이직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회사의 정보는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가게 된다면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글로벌 기업에서 커리어를 확장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력서를 넘길 때 까지만 해도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도전해서 손해 볼 건 없지!‘라는 심정이었어요.
외국계 기업답게 (결과 발표 예정일 +1주일의)아주 느긋한 속도로, 서류 통과 후 테스트 과제 평가까지 완수하고 나서 제가 선호도 1순위 지원자라는 반가운 결과까지 들었습니다만 첫 면접일 조정 단계에 (헤드헌터와 제가 같이)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글로벌 HR로부터 정규직 (permanent, full-time)포지션으로 안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채용사의 한국 지사 쪽 관계자의 말로는 매년 평가와 함께 계약을 갱신하는 구조이기에 ‘기한의 정함이 없는’ 국내의 정규직 정의와 다르다는 점을 먼저 통보해왔다는 것이 저의 쌔함 포인트입니다.
채용사측에서는 본사 및 지사의 현재 업무 역학에 대해 설명하며, 다른 국가에서는 정규직으로 제 직무에 해당하는 포지션을 모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부득불 1년마다 계약을 연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해 달라고 하십니다. 현재 신규 채용자를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가 일방의 파기 내지는 모종의 사유로 계약 연장에 실패할 경우 비싼 돈 주고 저를 계속 정규직으로 고용해야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논조의 이야기로 설득하려 하셨다고 해요. 별로 와닿지 않는 핑계여서 그런지 벌써부터 그런 전제조건을 들먹이는게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은 절대 손해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달까요? 외국계도 대감집 아니면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이래서 도는 것일까요...?
헤드헌터분은 자기도 이러한 내용을 지금 알았고 너무 충격이라는 식으로 제게 말씀을 전하셨고 이 조건을 수용하지는 말되 그래도 일단 면접에 나가 제가 가진 역량들을 두루 어필하며, 이 정규직 고용을 지속할 방법에 대해 서로 얘기를 해보면 어떻겠는지 권하시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보자면 ‘채용 조건 미리 말 못해준 건 정말 미안하긴 한데 너네 직종은 원래 계약서 베이스로 일하는 거 아냐..?‘(->당연히 아닙니다 전 지금 정규직^^)처럼 당당한 그들의 가스라이팅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꾸해야 하는지부터 일단 영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테스트 과제 결과가 그들에게 흡족했다는 이야기와 1년마다 계약 연장 조건 통보가 동시에 같이 들려오는 이유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오라는건지 도망치라는 건지 처음부터 정규직 채용이라 하지말고 깔끔하게 프리랜서를 뽑든지 좀 하나만 했으면 좋겠고... 솔직히 이쯤되면 헤드헌터 분도 한통속이라 의심해야 하는가 싶고요...
제가 마음에는 드는데 몸값을 후려치려는 밑작업일까요? (샐러리 밴드는 콜드메일 단계에서 이미 오픈해주셨습니다) 아니면 뭔가 제가 미처 모르는 정규직의 형태가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시는 분들께는 당연시 되어있는 것일지, 그렇다면 국내 노동법규를 피해갈 근거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저만 그걸 몰랐던 것인지 궁금하더라구요. 외국계기업이 사람을 잘 자른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고용 계약이 불공정하단 이야긴 금시초문이어서 말이죠.
우선 당장 이 조건을 수용하고라도 가는 게 맞을지, 아니면 제가 미리 최소한 시도해 볼 절차나 협상하여 반드시 사수할 조건들이 있을지, 그도 아니면 여기서 모두 접고 제가 먼저 뻥 차버릴지 결정하는 것조차 어렵네요. 칼자루를 쥔 구직자가 되었는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아요. 애초에 계약직에 준하는 자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지원하지도 않았을 일자리를 위해 퇴근 후 개인 시간 쪼개가며 (원래는 몇백만원씩 돈 받고 해주는 scope의 작업이지만 당연히 무급으로)테스트과제를 기한 내 죽어라 해내지도 않았을 것 같아 허탈하고 분한 감정이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터라 신중하고 냉철하게 판단하기 위해 몹시 노력중입니다.
물론 아무일 없단 듯 현 직장에 잔류하는 것도 저에겐 여러가지 이점이 있는 선택입니다. 적어도 지금 회사에서의 처우가 나쁘지 않고, 비전이 뚜렷하진 않지만 저도 커리어측면에선 불만족보단 만족하는 점들이 더 많았거든요. 그래도 이직을 강행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렸을 때 고용의 불안정+업계 이해도 낮은 상사와 함께 첫 세팅의 아비규환을 견뎌내고 제 포트폴리오가 조금 더 탄탄해지면 더 좋은 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될지도 모르죠. 이직을 포기한다면 당장 내년 연봉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크고, 제 직업의 특성상 자주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한 외국계 회사 합류는 더 멀리 미뤄지게 되겠지만 이 흉흉한 불경기에 회사에서 쫓겨날 걱정은 거의 안하게 될거에요. 언젠가는 영미권으로 진출해보고자하는 꿈이 있던 건 사실이라, 기대가 있었던만큼 좀 아쉽기는 해도요.
아무쪼록 저는 면접에 응할지말지 고민할 시간을 조금 벌어놓은 채, 어느쪽으로도 마음이 확실히 기울지 않은 혼란한 상태로 조만간 제 결정을 채용사측에 통보해야 합니다. 주변에 외국계는커녕 국내 회사를 다니는 지인도 그리 많질 않아서, 고민하다가 용기내어 이곳의 집단지성에 기대어볼까 합니다. 답도 없는 긴 넋두리를 두서없이 늘어놓아 송구스럽습니다만 여기까지 전부 읽어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리고, 저를 위해 슬기로운 조언이나 그저 뜬소문이라도 한 마디씩 보태주고 가시면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모두모두 새해 만사형통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