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스토리) 로마최초황제가 되는 건 너무 힘들어
아우구스투스, 본명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63년 로마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소도시 벨레트라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원로원 귀족 가문이 아니라 기사 계급 출신이었고, 혈통적으로는 전형적인 로마의 지방 유력자 가문에 가까웠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중상층 집안의 아들’ 정도였던 셈이지요. 그러나 그의 어머니 아티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였기에, 옥타비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카이사르와 일정한 친연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미묘한 혈연적 인연이 훗날 그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옥타비우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전장에서 활약하기보다는 행정과 정치에서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배움에 열심이었고, 남들 앞에서 차분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는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도자였던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후계자로 삼아 양자로 입적합니다. 이 순간부터 한 소도시 출신 청년의 삶은 로마 제국 전체를 바꾸는 궤도로 들어서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로마는 피로 얼룩진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원로원 귀족들과 카이사르파, 군대와 민중이 모두 분열되어 있었고, 공화정의 권위는 이미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 혼돈의 시기에 갓 스무 살을 넘긴 옥타비우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들고 나와 자신이 양자이자 정당한 후계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경험도, 군사력도 없던 청년이었지만, 그는 민중과 군대를 설득하며 차근차근 세력을 모았습니다.
그의 권력 장악 과정은 냉혹한 정치적 수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손잡고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합니다. 하지만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한 후, 옥타비우스는 점차 안토니우스와 대립했고, 마침내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승리로 그는 사실상 로마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고,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받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가 권력을 잡은 뒤 보여준 정치적 지혜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는 독재자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공화정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실권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황제가 아닌 ‘프린켑스(시민들 중 첫째)’라고 불렀고, 원로원과 귀족들의 체면을 살려주며 동반자로 대우했습니다. 그러나 군대의 충성은 철저히 본인에게 귀속시켰습니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bread and circuses, 즉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며 생활의 안정을 보장했고, 행정 개혁과 세제 정비로 제국의 재정을 튼튼히 다졌습니다.
그의 개혁은 실로 제정 로마의 기초를 다진 것이었습니다. 직업 군제를 도입해 국경 방위를 안정시켰고, 도로와 항구를 건설해 로마를 지중해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물려받았으나,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라는 그의 말처럼, 건축과 도시 정비에 심혈을 기울여 제국의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치세는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평화의 시대를 열었고, 이후 200년 가까이 로마는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아우구스투스는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는 냉정할 정도로 계산적이었고, 필요하다면 가장 가까운 동맹조차 희생시켰습니다. 안토니우스와의 결별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또한 말년에는 후계자 문제를 두고 가족 내에서 잦은 갈등을 겪었으며, 결국 이상적인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으며, 정치적 승리 뒤에는 항상 신중함과 절제가 따라붙었습니다. 이런 면모 덕분에 그는 폭군이 아닌 안정된 건국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그려보면, 한 소도시 출신의 청년이 혼란한 시대를 헤쳐나가 로마 제국의 설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놀랍습니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꿰뚫었고, 무력을 넘어 제도를 장악해야 진정한 지배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인간적인 갈등과 한계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제정 로마는 서양 문명의 기초가 되었고, 그 체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500년 넘게 유지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역사의 ‘시스템 창조자’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권력이란 단순히 힘으로만 얻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와 한 개인의 능력, 그리고 냉혹한 현실 감각이 어우러져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