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차 공간디자이너, 다시 방향을 찾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중반의 8년 차 방송세트·공간디자이너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용기 내어 이곳에 글을 남겨봅니다.
방송국에서 세트·공간디자이너 경력 계약직으로 일한 지 2년 차가 되었을 무렵, 회사의 경영난으로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주변에서는, 임원진까지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너는 꼭 정규직 전환이 될 거라는 분위기와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가능성을 믿고, 더 잘 보이고 싶었고, 회사 안에서 정규직이 될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4편의 드라마, 다수의 사업부 업무, 전시 기획, 3개의 쇼 프로그램 등 정말 많은 업무를 소화했습니다.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과 휴일 없이 일한 날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가정에 소홀해진 순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불안정한 배우 일을 하는 아내를 지원하려면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도 태어났지만, 육아와 집안일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일에 매달렸습니다. 힘들 때마다 ‘지금만 버티면 우리 가족에게 더 나은 안정이 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 계약 종료가 불가피하다. 면목 없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동안 버텨온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움과 분노, 허망함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회사에서는 애써 담담한 척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계약 종료 전 휴가도 미루고, 일주일 정도 프로그램 인수인계를 하며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육아와 집안일로 지쳐 있고, 다시 배우로 복귀할 수 있을지도 불안한 상황에서 제가 이 소식을 전하면 아내의 마음까지 무너뜨리는 건 아닐까 걱정됐습니다.
두 시간 정도 집 앞에서 서성였습니다.
감정이 조금은 추슬러졌다고 생각하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아기를 안고 해맑게 저를 반겨주는 아내의 모습을 보자마자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현관에서 울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왜 그래 라는 말만 반복하며 저와 함께 울었습니다. 결국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그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도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에 저는 더 서럽게 울었습니다. 미안함, 고마움, 억울함, 허무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더군요…
일주일이 지나고, 이제야 감정이 조금씩 추슬러지고 있습니다. 다행이 그동안 혹시나 하고 준비해왔던 포트폴리오와 이력서가 있어, 다시 정리해 올렸습니다.
지난 8년간 걸어온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는 공간기획 VM 쪽으로도 전환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잘될지, 쉽지 않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해맑게 옹알이하는 딸을 보고 있으면 다시 용기를 내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비슷한 불안정함 속에서 버티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저 역시 같은 마음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계약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해온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이 아니라, 저와 제 가족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찾는 시작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