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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집밥같은 가족같은 단골식당이 있나요?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은 단골 식당은 멀리서 봐도 편안합니다. 유리창 안쪽으로 보이는 하얀 김,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주방, 그리고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도 손님이 들어오면 환하게 웃어주는 사장님의 얼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갓 지은 밥의 포근한 향, 끓는 된장찌개의 구수함, 프라이팬 위에서 고소하게 익어가는 계란말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테이블에 앉으면 주문하기도 전에 따끈한 보리차가 먼저 나옵니다. 주문은 늘 비슷합니다. 제육볶음, 고등어조림, 김치찌개, 가끔은 청국장.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고르지만, 무얼 고르든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사장님은 찬장을 열어 오늘 만든 반찬들을 꺼내놓습니다. 오이무침은 참기름에 살짝 버무려 윤기가 흐르고, 시금치나물은 초록빛이 살아 있습니다. 멸치볶음은 바삭하게 볶아 땅콩이 박혀 있고, 김치는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뒷맛이 납니다. 밥은 뚝배기처럼 뜨거운 돌솥에서 갓 퍼낸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입에 넣으면 고슬고슬하면서도 차진 식감이 살아 있어, 그 순간 집에서 밥 짓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국물 요리는 한 숟갈만 떠도 속이 풀리는 맛입니다. 된장찌개 안에는 두부가 푹 잠겨 있고, 호박과 감자가 포근하게 익어 있습니다. 국물 사이로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겨울 아침의 입김처럼 따뜻합니다. 먹다 보면 사장님이 다가와 묻습니다. "반찬 더 드릴까요?" 그 말 한마디에 왠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집에서 엄마가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밥 한 숟갈 더 얹어주던 순간, 장독대 앞에서 김치통 뚜껑을 열던 소리, 명절 아침 부엌에서 들리던 부침개 부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벽 한쪽에는 오랫동안 붙어 있는 낡은 달력이 있고, 창가 자리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김치찌개를 드십니다. 그 옆에는 오늘 처음 온 듯한 젊은 부부가 아이에게 된장국을 떠먹여 주고 있습니다. 이 식당의 풍경은 그렇게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한 끼 밥상 앞에서 잠시 같은 시간을 나누는 다큐 한 장면 같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사장님이 "또 오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 목소리가 참 묘합니다. 단순히 가게 단골을 붙잡기 위한 인사가 아니라, 정말로 나를 아는 사람처럼, 내가 다시 오길 바라는 사람의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식당을 떠올리면 단순히 ‘맛있는 집’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이곳은 내 하루 속에 잠깐 스며드는 집 같은 곳, 밥 한 그릇으로 마음까지 채워주는 따뜻한 사람들의 주방입니다. 그런 식당을 만나는 건, 바쁜 세상 속에서 작은 기적 하나를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감성유랑극단방송
25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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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만한 넷플릭스 추천해주세요 ㅠㅠ
날이 너무 더워서 오늘 집에만 콕 박혀있으려는데 넷플 볼만한 거 뭐 없을까요? 그동안 본 것보다 안본 게 많아서 추천받고 싶습니다 ㅠㅠ 다큐 드라마 예능 애니 등등 장르 안가리고 봅니다!! 최근에 재밌게 보신 거 아무거나 추천 던져주세요!! 넷플에 없는 거여도 추천 남겨주시면 찾아볼게요 ㅎㅎ
@넷플릭스서비시스코리아(유)
후시딘숙
25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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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금과 기부금을 착각하는거 같아요.
캐러비안 연안국에 주택보급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24년 6월 현지에 급한 비용이 필요해 3억을 빌렸는데 마침 지인이 자기아들이 결혼하는데 돈이 필요한데 애비노릇도 못하게됐다 하길래 2천만원이면 되겠냐고 했더니 해주면 고맙겠다고 해서 즉시 입금을 해줬는데 일년이 되도록 안갚길래 돈 해주라고 했더니 톡,문자,전화 다 씹고 나도 같이 아는 사람에게 내 험담을 늘어놓았다는 소식이 들리네요. 내가 돈 빌릴때 자기도 입회인으로 서명했는데 돈 갚으라 한다고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면서.. 그돈이 이사람과 같이 일해서 보수로 받은것도 아니고 내가 빌려쓴거고 갚아야될 돈인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이쉐이를 아주 조지뿔까 두고볼까 고민이네요.
westgun
25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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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랑멀리사는데
주말에 어디가자고하면 데리러오는게아니라, 거기서 만나자고한다.. 시간을 소중하고 중요하게생각하는것도 알겠고 우리집에 들러서 가면 혼자 운전하기 오래걸리니까 그게효율이좋다는것도 알겠는데 나는 지하철타고 한시간가야하는거리 혼자 차타고 가서 거기서 만나자고하는건 연인이아니라 동업자나 직장동료아닌가? 물론 맨날 항상 이러는건아니지만.. 내가 초반에 서운한티를 좀 냈더니 눈치봐서 나태우러 올때도있지만 가끔 또 이럴때마다 의심스럽다. 서로좋아하면 지하철타고 가는 그순간까지 조금이라도 같이 붙어있고싶은게 마음아닌가?
살퀭이히
25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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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 삼계탕
점심 무렵 서울의 공기는 이미 쪄죽일 듯 무거웠다. 회사 근처 골목 끝에 있는 허름한 삼계탕집 앞에는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오늘은 복날이니까요. 사장님도 삼계탕 드셔야죠." 배달부 민수는 주인 아저씨에게 닭과 인삼 대추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사장 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웃지는 않았다. 그가 요 며칠 보인 표정은 늘 그랬다. 삼계탕집은 여전히 손님이 많았지만 정 회장은 마치 가게가 곧 망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손님 중에는 낯선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깔끔한 흰 셔츠에 뿔테 안경, 왼손에는 오래된 수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삼계탕을 다 먹고도 한참 동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혹시 몇 년 전 여름에도 이 가게에 오셨던 적 있나요?" 그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 회장은 숟가락을 멈췄다. "왜 그런 걸 묻죠?" 남자는 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5년 전 오늘 복날에 먹었던 삼계탕 가격과 재료 비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볼펜으로 힘주어 쓴 한 줄. ‘닭이 두 마리였다.’ 정 회장의 손이 떨렸다. "5년 전 제 형이 여기서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는 죽었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그리고 부검 결과 닭고기 속에 들어 있던 약물이 문제였죠." 가게 안의 소음이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정 회장은 한숨을 쉬며 뚝배기 뚜껑을 덮었다. "여름이라 다들 몸보신하러 온다지만 사람 마음까지 건강해지는 건 아니더군요." 그 순간 주방 쪽에서 인삼 향이 다시 퍼져나왔다. 그리고 정 회장은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삼계탕은 드시겠습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수첩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복날
AoBart
25년 08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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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도 월세를 못 냈어요ㅜㅜ
그래서 거미줄을 쏘는구나 ㅠㅠ
본투비한량
쌍 따봉
25년 08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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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가 장례식장 가는 것 어떻게 생각하세요?
먼저 상황을 말씀드리면, 저는 임신 10주차입니다. 금일 저의 친언니의 시모가 돌아가셨습니다 ㅠ 저희가족은 서울에 거주하고 장례식장은 대구 입니다. 저의 남편은 첫째(유치원생)와 저는 가지 않고 집에서 애도를 하면 좋겠다는 아주 완강한 입장이고.. 부모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언니네 가족이 상을 당한거니 임신해서 우려되는 것보다는 가족일이 먼저아니냐 하시며 안가려고 하는 저희가 이해안가고 오히려 언짢아하시면서 그냥 너네가족다 오지말어라 라고 하신 상황입니다. 저는.. 어떻게 할지 계속 고민입니다.. 미신이라 믿지 않고 싶지만 찝찝하고 또 친언니네 일이라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편과 부모님의 생각이 너무 달라 제가 결정해야할 것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수의 의견에 따른다기 보다 뭔가 제 마음이 움직이는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 말을 참고하게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 많은분의 고견 너무 감사합니다. 금일 오전에 남편 혼자 출발했습니다. 의견이 편향될까 쓰지 않은 내용이 있었는데,, 입덧도 있고 유산경험도 있어서 초기에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언니네 가족일이고, 이런일은 처음이었어서 고민이 참 많이 되었습니다. 언니네 형부 집안에 결혼하신 분이 아무도 없었어서 이해해즐까(언니도 아이가 없어요) 부터 많은 생각을 했네요 ㅠㅠ 그래도 다들 주신 의견에 따라 제가 제몸 생각하고 남편과 부모님이 가서 도리를 다하고 오신다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네요!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내어 읽어주시고 댓글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우리는워킹맘
25년 08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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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보통 얼마 주고 보세요?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 야구를 보여주고 싶어서 야구표를 봤는데 이미 다 매진이더라구요. 일단 취소표 대기는 해놨는데 혹시 안될까봐 티켓베이에서 장당 오만원짜리를 사야하는지.. 고민입니다. 다들 보통 얼마 주고 보시나요?
조닫
25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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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왔어요
블라만 알다가 오늘 처음! 블라가 싫어도 블라만 있는 줄 알고 계속 참았거든요. 이곳은 어떤 곳인지 기대하고싶네요.
뉴비61
25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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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산 8.5억...정체 ㅠㅠ
우선 저는 84년생...이고 결혼해서 애 한명 낳고 그렇저렇 지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직장생활 13년째이고 와이프 연봉을 합치면 대략 1.4~1.5억정도 둘다 흙수저 집안이라 결혼 전 양가에서 받은건 없고 아끼고 돌리고 해서 순자산 8.5억 모았는데... (퇴직금 제외기준, 뭐 얼마 되지도 않아요...ㅠ) 하..이제는 좀 막힌 느낌이랄까...몇년간 정체되어 있고 순자산이 늘어나지가 않네요. 나이는 자꾸 먹어서 이제 회사생활도 10년? 길어야 13년정도 할거 같은데... 조급한 마음이 자꾸 드네요.. (조급함때문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1억 가까이 손해봤었는데...최근 운좋게 제로 만들었네요ㅠ) 주변에 또래들 보면 다 저보다 잘 사는거 같고.. 그래서 머리속엔 맨날 어떻게 굴려야하지..이 생각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방향성
25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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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구 낮잠 좋네요
요즘 점심 후딱 먹구 낮잠 자는데 10-20분 자는데도 아주 개운하고 좋네요! 오후에도 그나마 덜 피곤한 느낌입니다
마케터곰발바닥
25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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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다시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그러니까 내나이가 스물셋, 넷되던 그 시기는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사람의 인생이 백년이라고 치면, 백년동안에 만날 나쁜 인간들을 1년이라는시간안에 한꺼번에 몰아쳐 만났다고 할까. 사기, 이간질, 배신, 구설수. 등등. 사람들의 관계에 치여 쓴맛을 참 여러번 봤다. 결국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람들과 치고받고 싸워서에 경찰서도 들락거렸고. 예술을 전공하였으나 정서가 불안해지자 작품활동이 전혀 되지 않았다. 늦어지는 졸업 탓에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성화시고. 그쯤되니 그냥 사람이란 대상이 모두 두려워졌다. 길가다 마주치는 고양이나 참새를 빼놓고 마주치는 인간은 다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길을 걷다 아파트가 보이면 떨어져 죽는 생각을 하고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 내가 치어서 죽는 상상을 했다. 자려고 누우면 잠도 잘 안 오고. 어쩌다 잠이 들면 꿈을 계속 꾸었는데 그 꿈도 매우 현실적이어서 현실과 꿈을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이 꽤 여러달 반복되었을 무렵. 지인을 만나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 점집 골목을 지나치게 되었다. 지인은 평상시에 그런 쪽(무속신앙)에 관심이 많은터라 점을 보자고 했다. 그 당시 지인은 꽤 오래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사이가 좋지 않아 고민이었다. 매사에 의욕이 없는 나는, 점은 너 혼자 봐라 나는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그냥 있겠다고 했다. 점집은 옛날 일본식 상가 건물을 그대로 고쳐 쓰고 있었다. 그곳은 역전 앞, 점집 골목으로 대부분은 점집들의 형태가 비슷비슷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신당이 보였는데, 주인이 없었다. 날이 아닌가 싶어서 그냥 나오자고 했는데 지인은 한사코 기다리자고 했다. 주인도 없는 신당에서 무려 30분이 넘게 기다렸다. 더는 기다리기 지루하고 또 우울한 마음이 도져서 먼저 가겠노라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지인은 망설였으나 기다린 시간이 아쉬웠는지 꼭 점을 보고 가겠다는 거다. 알겠다고 인사를 나누고 점집을 나서서 한 30미터 걸었을까. 저기 먼 곳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정갈하게 쪽진 머리를 한 중년 아줌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림새가 평범한 차림새가 아니라서 아- 저 아줌마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 하는 느낌이 났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성큼성큼 걸어 지나치려는 순간 중년여인이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왜, 조금만 더 기다리지 벌써 기어 나왔노." 팔목을 잡고 왔던 길로 다시 끌고 가는 것이다. 사실, 끌려가는 동안에 이 아줌마가 도를 아십니까나, 다단계같은 귀찮은 사람이 아닐까 머리가 복잡했으나 왔던 점집으로 밀어넣길래 이건 뭔가 싶었다. 그 당시에는 가정용 씨씨티비가 흔한 것도 아니어서 꽤 놀랬다. "아주머니, 혹시 다른 곳에서 씨씨티비로 보고 계셨어요?" 지인이 여러차레 물어봤으나 썩은 미소를 날리며 "내 장바구니 안보이나. 장보다 쌔빠지게 뛰어온 거 안보이나. 늦었으면 못볼 뻔 했네" 실제로 아줌마가 내려놓은 장바구니 안에는 대파며 사과며 뭐가 많았다. 지인은 기다린 보람이 있다며 기분이 업되어서 연애가 어쩌고 결혼이 어쩌고 쫑알댔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조용히 향에 불을 켜더니 "오늘은 너 말고 니 뒤에 가시내 이야기나 듣자" 며 나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작은 소반같은 걸 내 앞에 끌어다놓고 마주 앉았다. 나는 아무 의욕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길을 걷다가 아무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 내 뺨을 찰지게 때리고 지나가도 아- 내가 한대 맞았구나- 하고 다시 갈길 걸어가는 마네킹처럼. 그때 내 상태가 그랬다. 좀처럼 무슨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옆에서 지인이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옆구리를 찔러도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아줌마가 나를 유심히 보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리 죽고싶나." 경상도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이 지역은 전라도), 지인이 뭐라고요? 되물었더니 "아니~ 이 처자는 살고싶은 마음이 개미 눈꼽만큼도 없잖아. 친구아니야?" 지인 역시 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내가 죽을만큼 괴로워 했을거란 생각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지극히 외강내유형인지라 고민이 생겨도 내색을 안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쟁이 아줌마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나서 나는 오열했다. "내가 기도드리러 산에 갈때가 됐거든. 그래서 산에 갈 채비하느라고 한참 시장에서 장보고 있었는데. 아 느그 할머니가 살쾡이 같은 눈을 하고 날 보는기라. 사과를 하나 집어들면 사과 옆에서 째리보고 곶감을 집어 들면 곶감 옆에서 째리보고. 얼른 가라고 등 떠밀어서 진짜 가랭이 찢어지게 뛰왔다. 너거 할머니가 니 걱정 많~이 한다" ....... 그땐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2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어렸을때부터 할머니품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이가 각별했다. 너무 연로하신탓에 자연사로 돌아가셨기에 사람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두고 호상이다고 위로하였으나 사람의 죽음을 두고 잘 죽었다 논하는 것이 나는 분했다. 하지만 슬픔은 그때뿐이었고, 나는 나대로 대학생활을 하느라 할머니를 잃은 슬픔은 곧 잊고 살았었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삐질삐질 밀려나왔다. 처음에는 뭔가 서러워서 흑흑거렸는데 나중에는 감당이 안될만큼 꺽꺽거리며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정말로 정말로 힘들었는데 주변인은 나의 힘듬을 알아주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몰라주는 나의 힘듬을 돌아가신 할머니가 알고 계신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더더욱 서러웠다. "그래가지고 내가 쌔빠지게 걸어왔는데, 할매가 니 뒤따라서 걷고 있데. 니 뒤에서 울면서 따라걷는거야. 그래서 내가 너를 알아봤지. 허리는 구부정해가지고 .. 허리 ㄱ자로 굽은 거 느그 할매 맞제?" 점쟁이 아줌마는 허리를 구부리며 지팡이짚는 흉내를 냈다. 우리 할머니가 맞았다. 우리 할머니는 나이 오십에 산에 땔감 주우러 갔다가 산비탈에서 구른 후에 점점 허리가 굽었다고 했다. 점쟁이 아줌마는 내 손을 감싸 쥐면서 "힘든 때는 누구나 온다. 보니까 너는 마음이 다른 누구보다 더 여리고 깨끗하네. 순진하니까 상처도 잘 받는거야. 할머니가 니 걱정되서 잠을 못잔다하잖아. 힘들 땐 죽을 생각부터 할 게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이겨먹을 생각을 해야 산다." 시간이 너무 지난이야기라, 기억을 더듬어 쓴것이지만 아줌마는 아무튼 저렇게 이야기를 하며 나를 달랬다. 나는 할머니가 너무 궁금하고 걱정이 되어서 정말 할머니가 보이냐고 할머니는 왜 천국에 가지않고 눈에 보이는 거냐고 물어봤다. 왜냐면 우리집안은 사돈에 팔촌까지 크리스챤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교회 권사님까지 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사는 지내본 적도 없고 절 근처에는 가본 적도 없는데... 유일하게 나혼자만 불교인지라 집안에서 상또라이 취급을 받는 때도 있었는데. 교회식으로 말하자면 애진즉 천당가셔서 영면하셔야 할 분이 왜...? 점집 아줌마는 썩소를 지으시며 "나중에 죽으면 느그 할매한테 물어 본나" 하셨다. 아무튼 할머니가 손녀걱정에 죽어서도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복채를 드리려고 지인에게 눈치껏 얼마냐 물었더니 점집 아줌마는 됐다고, 다음에 둘이서 다시 놀러오라고 복채 받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니까 나는 생전 처음 점보는 곳에 가서 처음부터 끝가지 울기만 하다 나온거다. 너무 울어서 지인의 부축을 받다시피 해서 나왔다. 어떤 믿음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나는 조금씩 변했다. 할머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시 복학했고. 옆에서 누가 뭐라하든 정신승리로 버텨냈다.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알바를 두탕씩 뛰었으며 일이 끝나면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호프집이나 까페에서 꼭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고 나중에는 집에 혼자 들어가는게 싫어서 그 지인과 살림을 합쳐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나는 예전의 김푼수로 다시 돌아갔다. 가끔 그날의 그 점집이 생각나서, 오년 후엔가? 남자친구와 함께 찾아갔는데 그 거리가 싹 재개발이 되어서 새 건물이 들어서고 그 점집 역시 없어져있더라. 그 아줌마가 무속인이든, 뭐든간에 힘들어하는 어린 아가씨에게 시간을 투자해서 힘내라 응원해주어서 참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다. ----- 요즘 힘들어하시는 분 많으신 것 같아서 위로가 될 글인 것 같아서 퍼왔습니다... 모두 화이팅!
솜사탕퐁신
25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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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주의) 진짜 무서운 가위 이야기
본인 가위 엄청 자주 눌리는 편 근데 직업이 간호사라 수면시간 불규칙 + 스트레스로 최근에 가위 눌리는 빈도가 더 늘긴 했었음 근데 가위 눌려도 딱히 귀신을 보거나 그랬던 경험은 없었음 그냥 귀에 이명이 들리고 몸을 못 움직이고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정도만 경험했었거든 거기다 손가락부터 힘을 빡! 주면 가위에 금방 풀려서 사실 가위에 오래 눌려본 적도 없었음 근데 저번주에 코로나에 걸렸음 크게 아프진 않았는데 편도가 엄청 많이 부어서 침 삼킬 때마다 목이 엄청 아프고 나중에는 삼킴하면 귀까지 아플정도로 목이 엉망이었음.. 그래서 물도 못 마시고 침도 못 삼키고 그냥 누워만 있는데 잠에 들기도 힘들더라 침 삼킬때마다 잠에서 깨니까.. 그러다 겨우 잠들었는데 그때 가위에 눌려버림 평소에는 크게 고생없이 가위에서 깨는데 그날은 진짜 온몸이 통나무가 된 느낌으로 뻣뻣하게 굳어서 깨어지지가 않더라 귀에는 주전자 끓는듯한 이명소리랑 심장 막 빨리 뛰고 하는데 처음으로 귀신으로 생각되는 뭔가가 보임 뭔가가 내 옆에 서 있었음 관에 누운것처럼 정자세로 눕고 고개도 바로 된 상태로 자고 있었어서 얼굴은 안 보이는데 눈의 흰자로만 보이기에는 흰 원피스 입은 여자였음 여중생인지 여고생인지 뭔가 성인이 덜 된 느낌이더라 처음으로 바짝 쫄아서 몸도 못 가누고 있는데 나를 그렇게 몇분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라 사실 체감상으로는 몇분이었는데 30초도 안된 것 같기도? 그러다가 갑자기 손에 든 하얀 베개같은 걸 치켜 들더니 내 얼굴을 퍽 때리더라 그러면서 가위에서 풀려났음 당연히 꿈에서 맞은 거니까 아프진 않았는데 그 뭐라고 해야하지... 뭔가에 얼굴을 쳐맞았을 때의 놀람 + 기분더러움 그 느낌만은 생생하더라 별 거지같은 꿈을 다 꿨네 하면서 다시 자려고 누웠음 또 침 삼킬때마다 너무 아파서 진짜 겨우 겨우 잠들었는데 또 가위에 눌리고 걔가 나타남 마찬가지로 옆에서 쳐다보다가 베개로 내 얼굴을 내려침 또 xxxx 하면서 깨가지고 겨우 잠들었는데 또 또 또 이번에도 가위 눌리면서 걔가 옆에 서있더라 근데 더 열받는건 얘가 마치 나 놀리는것처럼 베개로 때리는 척하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 얼굴 내려침 마치 평타 캔슬 하듯이 페이크를 섞어서 때릴듯 말듯 하다가 때리더니 존나 쳐웃더라 사실 웃었는진 잘 모르겠음 웃는 소리도 안나고 얼굴도 안보이니까 근데 쳐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음 이때부터 진짜 존나 열받았었음 안그래도 잠들기도 힘든데 개같은걸로 자꾸 가위눌리고 개같은 걸로 잠에서 깨고 하니까 이번에도 나타나면 진짜 죽여버린단 생각으로 겨우 다시 잠에 듦 마찬가지로 또 가위에 눌렸음 이쯤되니까 빡이 돌아서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하는데 마찬가지로 가위에 눌리고 어김없이 옆에 서있더라 이번에도 때릴듯 말듯 베개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면서 마치 미드 부쉬에 박힌 핑와 막타를 쳐먹으려고하는 탑이랑 미드처럼 평캔을 오지게 하더라 존나 리븐 개고수인 ㄴ처럼 존나 청기백기 개고수인 ㄴ처럼 그러다 진짜 날 때리려고 맘 먹었는지 베개를 높게 쳐들었는데 그때 기적처럼 가위가 딱 풀림 내가 잉어처럼 퍼덕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니까 그 ㄴ이 화들짝 놀라면서 내 방에서 도도도 달려서 도망치더라 진짜 존나 개빡이쳐서 나도 그대로 내 방에서 나간다음 그 개같은 귀신ㄴ 죽일 생각으로 바로 주방에 가서 식칼 큰 거 하나 뽑은 다음 그 귀신ㄴ 어디있는지 둘러봄 거실 쇼파에 이불 덮어쓰고 숨어있는게 보이더라 그대로 걸어가서 그 ㄴ이 베개로 나를 쳤던 것처럼 나도 칼 이빠이 치켜들어서 찍으려고 했음 근데 당연히 귀신은 없었고 쇼파에는 우리엄마가 누워서 자고 있더라 새벽 네시 반 나는 조현병이 왜 무서운건지 알았음 ------- 오랜만에 소름이 오도도도해서 퍼왔어요
솜사탕퐁신
25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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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이야기 하나 보시겠어요?
1. 엄마의 증조할머니는 신내림 받은 무당이셨다고 한다. 대대로 이어진 신은 아니었기에 그리 영험하진 않았고 그덕인지 보통 신력이 딸에게 내려간다던 속설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손들은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덕에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엄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귀신이 수시로 보이거나 신이 깃들진 않았지만 죽음의 냄새를 잘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작은 엄마의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였다. 성격이 모질기로 유명했던 할머니는 그 성격탓인지 병치레도 길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노인의 몸을 닦아주려 세숫대아에 물을 받아 방으로 향하던 엄마는 낡은 문 앞에 선 기이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깡마른 몸을 하고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사람의 형체를 한 그것은 온 몸이 짙은 회색빛이었다. 알몸으로 할머니의 방문 앞에 서서 비적비적 움직이더니 이내 문을 향해 큰 절을 했다. 그리고 엄마가 세숫대아를 떨어트린 것이 먼저인지 방 안에서 곡소리가 난 것이 먼저인지... 그리 오래 앓아 누웠던 엄마의 할머니는 그것의 절을 받고 그대로 숨이 넘어가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머지않아 또 찾아왔다. 할머니의 성격을 이어받은 엄마의 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는 성격이 별나기로 유명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당시 암에 걸려 오랜 기간 병치레를 하고 계셨다. 그리 성격이 유별나시면서도 둘째딸인 엄마는 귀애했던 외할아버지였기에 나를 낳은지 얼마 안된 몸으로 엄마는 옆에서 오래 병수발을 하셨다. 죽을 쑤어 외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하던 엄마는 또 그것과 마주쳤다. 엄마는 죽그릇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몸에 비해 큰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 그것은 엄마를 보고도 아무런 동요없이 천천히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절을 하지 못하게 말려야 하는데 엄마는 발도,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외할아버지의 머리가 뉘인 방향으로 절을 했고 그와 동시에 방에서는 외삼촌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이야기한다. 그것이 아마 저승사자가 아니었을까 한다고. 혹은 오랜 병치레를 견디지 못한 자식들이 만들어낸 괴물일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 뒤 엄마는 한 번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이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졌다. 그 2년을 못버텨 내심 '어서 가셨으면'하는 마음이 그것을 불러낸 것만 같다고. 2. 엄마는 꿈을 꾸면 불안해했다. 잠귀가 예민해 수면제가 없이는 3시간 이상 푹 자지 못했던 엄마는 이따금 깊은 잠에 빠질 때면 무서운 꿈을 꾸곤 했다. 엄마가 약없이 푹 자는 다음날은 외출을 막는 엄마와 실갱이를 벌여야 했다. 하루는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 계속 불안해했다. 그러나 나나 아빠를 붙잡지는 않았기에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외출을 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흰 봉투 두 개를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빠의 말에 엄마는 "**이 신랑이 갔어. 그런데 제 아버지 죽었단 소리에 급히 오던 딸도 교통사고가 나서 가버렸어. 부주를 두 개 해야할 것같아서."라고 하곤 아빠와 급히 장례식장으로 향하셨다. 엄마는 다음날 나를 붙잡고 한숨처럼 이야기를 토하셨다. 꿈에서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주저 앉아서 울고 있더란다. 바닥을 치고 가슴을 치며 울기에 엄마는 왜그러냐고 달래주려 다가갔는데 친구 앞에 두 개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무덤 두 개 사이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는 친구를 본 엄마는 그대로 꿈에서 깼고 친구에게 바로 전화할까 싶었지만 괜한소리를 해서 기분을 상하게 할까 참았다고 한다. 친구분의 남편은 오랜시간 투병중이었고 그리 위중치 않은 병이었기에 개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셨단다. 그러나 곧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고 갑자기 전날 밤 상태가 나빠져 남편이 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위로를 건내고 신랑이 오는 대로 함께 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친구에게 또 전화가 왔고 엄마는 덜컥 심장이 내려 앉는 것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짐승처럼 울부짖는 친구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딸이 친구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오다가 사고가 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같이 타고 있던 친구들은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는데 딸만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루사이에 남편과 딸을 잃은 엄마의 친구는 울음도 메말라버렸고 엄마는 그렇게 한동안 친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뒤 엄마는 이따금 집안 어르신들의 꿈을 꾸곤 했고 그런 뒤에는 어김없이 어른신들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하루는 엄마의 시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가 꿈에 나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누가 들어도 혀를 찰 만큼 고약한 시어머니였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겪은 엄마는 아빠에게 '시어머니 모시고 살자고 하면 이혼이야.'라고 못박을 만큼 할머니를 싫어했다. 할머니 또한 엄마를 싫어했다. 며느리 중 유일하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맏며느리는 언제나 눈엣 가시였다. 그래서 고부관계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명절을 제외하고는 왕래가 없었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사실도 엄마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장남인 아버지는 자신의 부인과 딸이 최대한 어머니와 만나지 않게 애썼다. 그래서 우리에게 할머니의 병세를 알리지 않았다. 엄마는 꿈에서 기나긴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강 건너에서 돌아가신 시어른들이 보였다고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시고모할머니와 시할머니, 시할아버지와 돌아가신 시아버지까지. 그분들은 꽃밭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리고 엄마의 옆에는 할머니가 서 계셨다. 할머니는 곱게 한복을 입고 강 건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내 강을 향해 발을 내딛었고 강 저편을 향해 가는 할머니를 엄마는 그저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할머니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엄마는 그래도 곧 가실 텐데 얼굴을 보여드리라고 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엄마의 제안을 끝내 거절했고 엄마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김치를 담고 고구마를 쪄서 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 다녀오셔선 몇날 몇일 한숨만 쉬셨다. "그 할마시가 나한테 사과를 다 하더라." 엄마는 멍하니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셨다. 엄마 손에는 할머니가 엄마 환갑 때 주신 붉은 복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환갑에는 부모가 자식 용돈 챙겨주는거라며 주셨던 복주머니. 엄마는 그 복주머니를 만지작거리시더니 또 깊은 한숨을 쉬셨다. "할마시 못난 자기 아들이랑 사느라 고생했다고 미안하다더라. 갈 때가 진짜 되긴 됐는갑다. 못된 할마시." 그리고 엄마가 꿈을 꾸고 정확히 일주일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집으로 돌아가셔도 된다고 한 그 바로 다음날 아침 그대로 일어나지 않으셨다. 87세,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다들 오래 울지 않았다. 엄마는 전혀 울지 않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서럽게 우셨다. 노친네 미워하는 마음 풀지도 못하게 하고 갔다고 서럽게 우셨다. 3. 나는 취미로 타로카드 공부를 했다. 그저 고등학교 축제에서 돈을 벌기 위해 재미삼아 시작한 것이었다. 엄청난 양의 카드를 다 외우는 것은 입시를 앞둔 나에겐 귀찮은 일이었고 제대로 다 외지도 못한 상태로 동아리 부스에 앉아 손님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축제에서 큰 것을 바라고 타로카드를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학업이나 연애 등을 가볍게 물어봤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리고 나는 복채랍시고 1,000원씩을 받았다. 그러다 한 여자가 타로를 보러 왔고 특이하게 건강에 대해서 물어왔다. 대충 카드를 뽑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심장에 병이 있네요. 선천적이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명은 긴 편이니까." 여자는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했다. 나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입이 자의식을 가진 마냥 제 멋대로 술술 움직여 나온 말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났는지 애들이 쉬는 시간에 찾아와 타로를 봐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용돈이 궁했던 나이었기에 나는 신이 나서 과자 하나, 음료수 하나를 받고 타로를 봐주곤 했다. 그러다 얼마 뒤 엄마랑 함께 집 근처에 사시던 무당 할머니댁에 놀러를 갔다. 신력을 거의 잃으시고 무당일은 하지 않고 힘든 사람이 찾아오면 아는 용한 무당들을 소개해주곤 하던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날 보면 늘 연신 팔이며 머리를 쓸어주곤 하셨다. 늘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셨다. 그러나 그날은 날 보더니 표정이 차갑게 굳으시곤 우리 엄마를 향해 화를 내셨다. "사주팔이까지 하며 내가 조심히 키우랬는데, 애한테 왜 잡귀가 들게 냅두노." 엄마는 무당 팔자에 아빠는 중이 될 팔자인데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나를 낳았기에 나는 원래 타고난 명이 짧거나 불우할 팔자라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엄마에게 내 사주를 팔라고 했다. 내 사주를 다른 부모 밑으로 넣어 귀신들의 눈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피를 받아 신들이 탐내기 쉬운 먹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엄한 얼굴로 나에게 신신당부하셨다. "니 계속 그런 무당 흉내 내고 다니면 잡귀 붙는다. 앞으로 그런 짓거리 하지 마라. 절대 하지 마래이." 나는 그 뒤 타로카드를 버리고 절대 남의 점을 봐주는 일따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나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하셨다. '절대 귀신 불러들이지 말그라.' 4. 우리 외할머니는 참 어른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노친네라고 하대하던 아버지도 '너희 외할머니는 참말로 어르신이다.' 라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 하곤 했다. 외할머니는 남에게 화내는 법을 몰랐다. 성격 유별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도 단 한 번 원망하는 말 없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아오신 분이셨다. 자식과 사위, 며느리,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 잘못으로 외할머니가 크게 다치신 적이 있는데 놀라서 우는 나를 향해 할머니는 "괜찮다. 놀라지 말그라."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흐르는 피 대신 내 눈물을 먼저 닦아주셨던 분이셨다. 그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농활중이었다. 10일간 농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중이었기에 엄격한 규율 아래 휴대폰을 보는 것은 정해진 시간을 제하고는 금지되어 있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던 나는 갑자기 열이 오르고 속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밤부터 시작된 고통은 아침까지 이어졌고 선배들은 내 상태를 보더니 일을 가지 말고 숙소에서 자고 있으라고 했다. 진통제와 감기약을 먹고 바닥에 누워있던 나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심장이 뛰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빨리 휴대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모아둔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안다면 크게 혼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휴대폰을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켜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 뜯었다. 그리고 폰이 켜짐과 동시에 연달아 진동이 계속 울렸다. 부재중 전화 37통 문자 25개. 모두 엄마로부터 온 것이었다. 「어디고 할머니 위독하시다. 전화 해라」 「할머니 돌아가셨다.」 「전화 좀 해라.」 연달아 온 문자를 본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선배들이 오빠에게 전화를 해 가까스로 짐을 꾸리고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입관하기 5분 전 도착해 다행히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많아서 생각할 틈도 없었다. 울다가 쓰러진 엄마를 돌보랴 손님들 맞이하랴, 맏손녀인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모든 손님이 다 사라진 새벽 1시, 그제야 바쁜 것이 슬픔을 잊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 보내는 자리에 자식들은 씻어서도 편히 자서도 안된다고 하던가, 이모, 외삼촌들은 이불도 덮지 않고 찬 바닥에 웅크려 눈만 감고 계셨다. 나는 문득 다시 슬픔이 떠올라 창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엄마와 막내이모도 잠이 오지 않는지 내 옆으로 오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한 번 보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기엔 외할머니가 계셨다. 내가 할머니를 다치게 했을 때 피보다 먼저 내 눈물을 닦아주시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창으로 장례식장 안의 자식들과 손녀들을 휘 한 번 둘러보시고는 걱정스런 표정을 하셨다. 나는 엄마가 알면 더 슬퍼할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이고 엄마, 편히 가시오. 자식 걱정은 말고." 엄마가 갑자기 울면서 말을 했다. 막내 이모도 이내 가슴을 치며 울었다. 엄마는 창밖을 보며 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울었다. 저승가는 길까지 자식들 걱정이나 하고 왜 그러냐며 서럽게도 우셨다. 엄마랑 막내이모도 나와 함께 창밖에서 우리를 보던 할머니를 본 것이다. 하관하던 날, 아침부터 모진 비가 거세게 내렸다. 친척 어르신들은 이러다 하관 못하겠다고 근심스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셨다. 엄마는 내내 창밖을 보며 울고 계셨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선산에 도착함과 동시에 날이 거짓말처럼 갰다. 비가 모두 그치고 햇빛이 나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 평소 성품대로 자손들 힘이 들까 울음을 그쳐주셨다며 참 인정 많은 어르신이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하지만 나에겐 따스한 할머니의 성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일화였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자신은 다시 태어나면 고운 아가씨로 다시 태어나고 싶으시다고 했다. 얼굴이 그리 곱지 않으셨던지라 큰 행사나 바깥 나들이에 외할아버지는 부인인 외할머니 대신 우리 엄마를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래서 고운 아가씨로 태어나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다 하셨다. 우리 엄마는 그 말을 듣고 고운 아가씨로 태어나면 더 좋은 신랑 찾아가야지 왜 그 고약한 아버지랑 다시 결혼하냐며 타박을 하셨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랑 다시 결혼하고 싶다 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 엄마 꿈에 외할머니는 고운 한복을 입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외할아버지 뒤를 그렇게 따라가고 있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났을까, 엄마나 이모들 꿈에는 이따금 등장하던 외할머니가 내 꿈에는 뵈는 일이 없었다. 어린시절 할머니 품에서 컸던지라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 아파트 입구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늘 곱다고 이 한복만 입으라고 칭찬했던 외할머니의 옥색 한복이 보였다. 고운 한복에 미용실에서 싼 돈을 주고 풀리지 않게 볶은 하얀 머리. 동그랗고 좁은 어깨까지. 틀림없이 우리 할머니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너무 반가워 대뜸 "할매!"하고 불렀다. 오후 6시, 여름의 시작이라 해가 제대로 지지도 않은 밝은 날이었다.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이 틀림없이 우리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한 번 그리고 우리집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그 뒤 엄마는 큰 수술을 했다.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큰 수술이었기에 엄마도 나도 아빠도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문득 외할머니가 그리 걱정되는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손녀에게 부디 당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저승에서도 자식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계실 것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출처 : 우리가족 소소한 이야기 (디미토리) ----- 입추를 보내고 날이 좀 선선해졌지만 그래도 오늘같은 날 보면 좋을 이야기 가져왔습니다
솜사탕퐁신
25년 08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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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평생 20대에 머물러있는거같다
사람의 마음은 참 오래도록, 어느 순간 멈춰버린 듯한 채 살아갑니다. 그 시점은 유난히 감각이 예민하고, 세상이 처음으로 뜨겁게 다가왔던 시절, 바로 20대입니다. 몸은 분명 나이를 먹고, 주름도 생기고 체력도 줄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은 여전히 그때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똑같이 설레고, 그때 보던 영화를 다시 틀어놓으면 익숙한 대사에 미소 지으며 빠져듭니다. 20대에 좋아하던 노래는 단지 음악이 아니라, 그 시절 내 감정의 배경음이었고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감싸는 공기였습니다. 심지어 그 가수를 지금도 좋아하고, 그 무대 영상을 유튜브에서 또 찾아보곤 하지요. 그때 좋아하던 연예인은, 지금 봐도 여전히 ‘내 이상형’ 같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람의 미소에는 첫사랑 같은 감정이 녹아 있습니다. 그 시절 감성이란, 참 독특합니다. 어설픈 듯 진지했고, 말 한마디에 울컥했고, 누군가의 손길 하나에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던 시절. 사랑이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던 시기. 이상형은 사실 구체적인 조건이 아니라 느낌 하나로 정의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길을 걷다 마주친 누군가의 눈빛만으로 하루 종일 멍해지기도 했지요. 그렇게 내 마음은 계속해서 시간을 따라가고 있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 시절 어디쯤에 자리를 깔고 눌러앉아 있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 그때 빠져들던 감성, 그때 꿈꾸던 사랑의 모양이 지금도 내 감정의 기본값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여전히 그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대화에선 괜히 진심이 튀어나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드러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처럼 사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조건보다 설렘을 먼저 보고, 계산보다 감정을 믿고 싶고, 여전히 그때처럼 누군가를 뜨겁게 만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마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시절을 끝내 떠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라는 시공간에 머물러 계속 나를 구성하고, 내 선택과 내 감정의 기준이 되어주고, 때로는 나를 붙잡고, 때로는 나를 또다시 시작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마음은 평생 20대 어딘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건 유약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이 너무 뜨겁고 찬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그때처럼 살고 싶고, 그때처럼 사랑하고 싶은 겁니다.
감성유랑극단방송
25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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