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40세 첫 이직기
글에 앞서, 개인의 경험과 신념으로 작성한 글이므로, 가볍게 참고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전 직장에서의 현타
저는 첫 직장 중소기업을 13년 동안 다녔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만29세에 첫 취업을 했기에, 누구보다도 감사한 마음으로 낮이고 밤이고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단 2년차까지요.
처음엔 내 자리, 내 명함이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지만.. 사람이 참 간사한게, 3년차가 시작되면서 여타 직원들과 다를바 없이 불만을 품게 되더군요.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12년까지 흘렀습니다.
그동안 회사는 매출이 3배 가량 올라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되었고, 임직원도 2배 이상 늘었네요.
12년간 크게 변한 것 중엔 업무문화 측면도 있습니다.
규모가 커지고 소위 MZ 세대가 편입되며 야근이 기본이던 업무문화가 칼퇴가 일상으로 자리매김했죠.
겉보기엔 "그래서 대체 뭐가 불만이야?" 라고 생각되겠지만, 속은 타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힘 없는 연구소
이 회사 연구소는 말만 연구소지 개발, 양산, 품질, 고객대응, 영업, 구매, 자재 등 범회사적 업무를 많이 떠안고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국내 회사 연구소는 이런 고질적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봐도 너무 과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 부서 간 R&R이 정립되고, 협업 시스템이 어느정도 작동해야 하는데.. 이곳은 규모는 커졌으나 업무 수준은 중소기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연구소 의존적 업무 문화가 저에겐 예전보다 더욱 버겁게 느껴졌죠.
설상가상으로, 임원진들은 눈만 높아져서 연구소에 대기업급 시스템으로, 무려 '스스로' 거듭날 것을 강요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시스템에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타부서 업무로 진정한 연구는 없어지고 대부분이 망상과 거짓을 문서화한 페이퍼워크가 만연한 지 오래였죠.
두 번째, 중간 관리자로서의 역량 한계
제가 10년차가 넘어갈 무렵, 중간 관리자로서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위로는 업무태만과 두서없는 업무지시, 아래로는 역량 및 의지 부족인 샌드위치 구조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 윗 사람들은 Out of control 이니 호전적이지도 않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아래로는 명확한 업무지시, 스케줄링, 교육 등으로 관리를 해야 했지만 저 자신이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대부분의 부하직원을 역량 및 의지 부족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밑에 약 7~8명 정도의 부하직원이 있었는데 데일리 업무보고를 작성하는 데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퇴근 전 이걸 챙기는 자체도 스트레스가 컸습니다.
왜냐면 윗 사람들의 업무태만으로 상당수의 업무를 제가 쥘 수밖에 없었기에 업무시간엔 부하직원들의 업무를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2. 퇴사 및 이직 결심
이러한 이유로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여기에 더 있다간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이만 먹고 점점 물경력만 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죠.
그때 이미 저는 만40세였습니다.
진정한 개발 다운 개발도 못한 채 저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발표 및 보고용 페이크페이퍼워크나 하고 있고 부하직원의 업무 뒤치다꺼리나 해야되는 상황이 몇 년 지속되면, 저 자신은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때 친한 직장 동료와의 대화를 통해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저는 gpt의 도움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현 회사 상황, 저의 업무 성향, 이곳에서의 주된 업무 등을 엄청나게 상세히 서술하며 제 생각도 정리할 뿐더러, 나름 제3자의 객관적(?)인 피드백도 받은 거죠.
처음에는 불만 100, 낙심 100, 현타 100인 상황에서 생각을 정리하니까 현재 나의 역량, 커리어 등이 보이더군요.
그리고 보잘것 없다고 여겼던 이 커리어를 어떻게 확장할지 고민했습니다. 이때 gpt와 주고받았던 내용이 방대해서, 지금 정독하면 1시간은 족히 넘는 분량이 쌓였습니다.
결국 남는 것과 떠나는 것의 비교 분석이 '남는 것<떠나는 것'으로 된 순간, 미련이 없어지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오랜 기간 구르며 나름 최선을 다해 일한 경험들이 저에게 커리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삶을 돌아보게 되자 불만이 점차 감사함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3. 이직처 확보
결국 규모는 1/10 정도로 작지만 거의 동종업계인 한 회사에 연결이 되어 면접을 봤습니다. 규모상 경쟁업체는 아니지만 동종업계라 굉장히 조심스러웠죠.
상위규모의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오니, 당연히 현 회사에서는 반가웠을 겁니다. 급여만이 문제였겠죠.
규모를 낮추는 대신 급여를 15% 올려서 제시했습니다.
물론 최초 제안보다는 깎였지만 영끌 기준 12~13% 상승이 되어서 승낙하고 기존 회사에 통보했습니다.
4. 퇴사 전 두려움
통보하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더군요. 인수인계를 위해 통보 후 퇴사까지는 1달 텀을 두었습니다.
그때가 좀 홀가분하면서도 한켠으론 두려웠습니다.
아무래도 만40세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지 않습니까?
회사 규모를 낮춘다는 느낌이, 도시의 따뜻한 아파트에서 아무것도 없는 시골집으로 가는 기분이었죠.
사전에 리멤버 커리어 글도 많이 봤습니다. 이직 시 규모를 낮추지 말라는 의견이 8할 이상이고, 가끔 규모 낮춘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을 뿐이었죠.
저는 좀 희한하게도 규모를 낮추고 급여는 꽤 올렸지만, 회사 규모 자체가 주는 커리어와 안정감이 있기에.. 두려웠죠.
이때 저를 전진시켰던 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일에 대해 최선을 다 하는 인간이라는 신념과 더 이상 늦으면 이 의지도 꺾이고 기회도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죠.
만약 새회사에서 이렇게 충실한 노예를 못 알아보고 단물만 빨고 버린다면, 어차피 그런 회사는 언젠간 망할 곳이니까 오히려 땡큐 라는 무적의 논리를 펼친 것이죠.
5. 이직
규모가 작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크게 체감이 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은 건, 제가 속한 선행개발팀에는 텃새나 정치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텃새 부리거나 정치질을 할 정도의 규모도 안 된다는 거겠죠..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직자들이 많았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다 오신 분들이 많아서 제가 모르는 부분에선 배울 점도 많고, 규모가 더 작은 곳에서 일하던 분들도 많아서 다방면에 능한 분들이 많더군요.
처음엔 좌절도 했습니다. 나름 13년의 경력이면 어디가서 꿇리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너무 폭이 좁게 일했더군요. 아무래도 중견 규모다 보니 아무리 분업이 안 됐더라도 어느 정도의 분업이 된 상태에서 일했던 거죠.
그래도 일하다 보니, 저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고 그 부분을 채우며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직을 하니 전 회사에서 겪었던 매너리즘은 온데 간데 없고.. 오히려 번아웃이 올 정도로 일하게 되더군요.
덩달아 칼퇴도 온데간데 없어졌죠... ㅠㅜ
그래도 급여 오른 값을 하자는 생각이 강해져서 불만은 없이 일하고 있고, 지금 8개월이 되었는데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6. 마무리
규모를 낮춰서 이직한 것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업무간섭이 적다는 것, 역량 발휘할 곳이 넘쳐난다는 것, 체계가 없어서 급여 또한 협상하기 나름이란 것 정도가 되겠네요.
단점은 일이 많다는 것,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곧 야근과 번아웃을 불사해야 한다는 거죠), 무엇보다 사업에 대한 매출 안정성에 불안해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저는 단점보다 장점에 배팅을 했고, 아직은 그 배팅이 유효했다 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년(50중반)까지도 눌러앉을 수 있는 회사를 떠나서 새로운 도전을 했는데, 60세, 70세까지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이번 도전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전도 한 번 해본 사람이 두 번 할 수 있는 거니깐요.
이벤트를 위해 쓰긴 했지만, 이곳에서 눈팅하며 받은 도움이 많아서 언젠간 쓰려 했던 글을 이제야 썼습니다.
여기까지 두서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여러분의 커리어도 차곡차곡 잘 쌓으셔서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