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이 약속. 혼자 강원도. 연락두절된 남친. 헤어지는 게 맞겠죠?
남친이 저더러 이런 걸로 유난 떨지 말라는데 제가 진짜 예민한 건지 좀 봐주세요.
한 달 전부터 남친이 그러더라고요. 이번 새해에는 꼭 같이 동해 가서 첫 해돋이를 보자고요. 제가 원래 잠이 많아서 망설였는데, 남친이 자기가 숙소도 예약하고 코스도 다 짜놓을 테니 믿고 따라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어제 퇴근하자마자 강원도로 가기로 했는데, 남친이 친구들 송년회가 잡혔다며 잠깐 들러서 친구들 얼굴만 보고 바로 출발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매해 뒀던 자기 기차표를 취소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만 먼저 가있으라고. 자기는 친구들 만난 후에 차 몰고 가겠다고.
당연히 기차표는 다 매진이라 다른 표를 구하는 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이 따로 강원도로 가기로 했어요. 저 먼저 숙소에 가서 쉬고 있고 남친은 밤 늦게 오는 걸로.
평소에도 친구들이랑 노는 걸 엄청 좋아해서 거기 못가게 하면 너무 서운해 할 게 뻔하거든요. 어차피 중요한 건 새해 첫 날 같이 해 뜨는 걸 보는 거니까. 그래서 저 혼자 숙소에 도착 후 일찍 잠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오늘 아침 6시로 알람 맞춰놓고 일어났는데 남친이 없더라고요.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아예 안 온 것 같았어요. 전화를 10통, 20통을 해도 안 받았습니다. 술 마시다가 못 온 건가 하고 화가 났다가 또 혹시 운전하다 사고라도 난 거면 어쩌지 걱정했다가 전화를 몇 번을 더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채로 혼자 숙소 베란다에서 해가 떴는지 안 떴는지 인지도 못한 채 멍하니 지켜봤네요.
아까 11시가 넘어서야 연락이 왔습니다. 친구 집에서 송년회를 한 거였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술을 좀 마시게 됐고, 술 마셔서 운전을 못하게 됐으니 기차나 버스 취소표를 찾으려고 계속 새로고침을 한다고 했는데, 그러다가 그대로 뻗어서 잤답니다.
너무 화는 났지만 뭐 그럴 수 있죠. 워낙 좋아하는 친구들이고, 송년회에서 술 안 마시고 참는 거 어려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말이라도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갈게" 라고 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거예요.
제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한 달 전부터 약속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하냐며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인지 몰랐다고 따졌더니 돌아오는 말이 가관입니다.
고작 해 뜨는 거 하나 못 본 걸로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해는 내일도 뜨고 모레도 뜨는데 친구들 다 모이는 건 이제 나이 들어서 어려운 일이라고. 거기 갔다가 이렇게 된 게 그렇게 큰 죄냐고, 자기는 오려고 노력했는데 차가 없는 걸 어떡하냐고. 자기도 어제 계속 똥줄 탔었다고 새해 첫날부터 피곤하게 이러지 말자고.
이걸 듣고 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어디부터 말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진짜 너무 피곤하고 너무 화나고 너무 지쳐서 나도 모르게 야이 미친ㅅㄲ야! 소리 지르고 끊어버렸습니다. 욕한 건 잘못한 거 인정하지만 도저히 못참겠더라고요.
내가 이런 사람을 남자친구라고 만나왔다니. 아닌가 내가 진짜 너무 이해심이 없었나. 난 진짜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지금이라도 갈까 말했으면, 아니면 지금 서울 돌아오면 자기가 마중나오겠다고 뭐 이렇게 미안해하고 만회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진짜 괜찮았는데 참...
새해 첫날부터 진짜 피곤하네요. 새해 첫날부터 솔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되는 걸까요. 이런 걸로 헤어짐을 생각하는 제가 이상한가요? 너무 진이 빠져서 그런가 잘 판단이 안 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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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다들 너무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어제는 피곤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너무 받아서 뭐라고 글을 썼는지도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제가 봐도 제가 진짜 바보 천치네요. 사실 여러분의 댓글들 아니었으면 그래도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했을 것 같아요. 원래 그런 성격이라. 너무 제가 잘해주기만 해서 그 친구도 저한테 그랬나봐요. 근데 잘해주면 자기도 더 잘해주려고 했어야지 제가 진짜 사람을 잘못 보긴 했나 봐요.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려고요. 얼굴보고 말하기는 싫은데 또 카톡으로 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고민중입니다.
하지만 예의는 저 친구가 계속 안 지켰으니까 저도 마지막 예의쯤은 안 지켜도 되겠죠?
모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