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들은 보지 마세요. 연봉 올리기 특강.
결론은 “이직”. 나한테 만 미련하기!
끊임 없이 이직 하세요.
그만큼 준비 하세요.
의리, 책임 이런소리 하지 말고
공부하고 어필해서 이직 하세요.
이직해야 연봉이 뜁니다.
대표들도 앞에서는 “너 뿐이다” 하고
뒤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을 찾습니다.
부자들이 법을 지키라고 강조 합니다.
그러고는 그들은 반칙을 합니다.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고 직진을 합니다.
그래도 반칙은 할 수 없으니
무던히 가야합니다.
돌아가는 길도 흔들리지 않으면
빠를 수 있습니다.
(강남에서 일산 갈 때, 외곽으로 크게 돌아
빨리 갈수도)
제 경험 입니다. 긴 글 입니다. 나눠 보세요.
자랑으로 받아들이는 분도 있겠지만
연봉 때문에 우울해하는 분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것이니 거슬리면 패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니 멘트 패스~
어려서 부터 돈을 잘 벌었습니다.
청소년기 에도 알바해서 부모님께
양장 사드릴 정도는 벌었고
대학 다니면서도
여름 휘트니스 센터
겨울 스키장 등등 월 2백 이상을 벌어서
첫차가 티뷰론 새차 였어요(보험 다 직접 냄)
자동차 설계를 시작한 25세,
107 만원으로 시작 했습니다.
당시 프리랜서들이 월 4백에
장비료 2백을 포함, 6백 버는 것을
보고 목표로 삼았지요.
목적은 “고든머레이” 가 되자 였습니다.
21년. 연평균 1천 만원씩 올렸네요.
방법은 이직 입니다.
첫 회사에서 실무에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체력이 워낙 좋다보니
일주일 내내 쪽잠 자며 철야도 참 많이 했죠.
대표는 엄청 칭찬 했지만
돈을 더 주지는 않더군요.
모터쇼에 가서 보게 된 수제차 회사에
매일 매일 모델링 이미지를 첨부하여
메일링을 3개월 간 했더니
면접을 오라하여 합격 했습니다.
첫 회사에는 당월에 퇴사 한다고 하고
다음달 부터 두번째 회사에 갔죠.
일복이 터졌네요.
데이터가 없었습니다. 전혀요. ㅎㅎ
(차는 있는데 데이터는 없다? 그때는 그랬다는)
10살 위 대우차 출신 사수와
5살 위 전장업체 출신 사수라 강요하는
동료는 곡면 설계를 못 했습니다.
(대기업 출신은 설계 할 줄 모르고 입 만 덜렁)
차 한대분 설계를 전부 했네요.
(바디, 무빙, 공조, 하네스, 파워트레인 구성)
[현대차 용역 진행 시 받았던 투카 데이터,
삼성차 용역 진행 시 데이터 반영]
<아마도 한국인 유일 풀카 설계자!>
지금 생각하면 20대에 뭘 안다고 했을까
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컷죠.
급여 채불 6개월 째,
사장이 불러서
“너 만 3개월 밤 새면 50명이 먹고 산다”
하기에
“해 보겠습니다” 하고 하루에 한시간 자며
출시 한 차가 카니발하이리무진(특장) 입니다.
이 차의 모든 데이터가 단 한 명이 한 겁니다.(기아차 PL 대응 전부 혼자 함)
전 기대를 했습니다. 돈을요.
그런데, 대표의 한마디. “월급 나오잖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어셈블리 파일을 지워버렸습니다. ㅎㅎㅎ
(파트와 도면은 남겨 놨어요.
철야 3개월 메인 아세이 파일 딱 하나
지웠죠. 이거 다 어셈 하려면 몇 년 걸리죠)
그리고 일 을 안하고 면접 만 보러 다녔네요.
회사에서도 단 한마디 어느 누구도
제게 불평 못했습니다.
저 혼자 다 하고 퇴직금도
소송해서 겨우 받았을 정도로 바닥 수준
인성의 대표 부부들 이었으니까요.
이 때 알았습니다.
쇼를해서(이상적 표본) 사람을 불러들여
꿈을 주며 준비시켜 다른것(표준 품목)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스포츠카로 끌여들여
밴에 뚜껑 올리기로 돈벌어 눌러 앉히기. ㅎㅎ
세번째 회사는 3천만원을 넘게 받았습니다.
이번엔 자동차 신차 인증 업체 였습니다.
일본회사 였는데
이놈들 하는 꼴이 신기 하데요.
무역협회와 은행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이 때 알았죠.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지사를 낼 때
정부에서 지원을 해준다는 것을.
법무 행정을 하면서도 이직 준비를 했어요.
영어 공부도 하고 일어 공부도 하고
설계도 키네메틱과 날이지 등등
이력서를 계속 넣던 중
4천 이상 준다는 곳이 있어서
출근 거리가 1.5시간 이지만 이직 했습니다.
여기서는 현기차 파일럿을 개발 납품 했는데
이 때 남양 담당자들과 모비스 직원들
많이 친해졌죠.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사업장이 동탄 이었는데
기존 공장이 보상을 받고
이사 온 곳이 또 수용 되면서
어떻게 해야 보상을 많이 받는지
알게 됐네요.
(이 때 부터 부동산에 눈을 뜨고
매일 법원경매, 온비드 살핍니다)
잘 다니고 있는데
수제차 만들던 곳의 나이 많은 동료가
대머리가 되어 왔기에
“왜?” 하니
“취업 안되서 공장 차렸는데 안돼” 해서
남양, 마북 연구원들 설득해서
최초로 탄소섬유 제품 납품 업체 등록을
단독으로 이뤄냈습니다.
창업 멤버가 되었지만
스타트업은 녹녹치 않죠.
그래도 초기 투자금의 10배를1년 만에
30배를 2년 만에 하고서
돈을 더 달라 하니 못 준다네요. ㅎㅎㅎ
어려울때 도와주면 고생만 하데요.
(잘될 때 많이 받고 적당히 하는 것도 실력)
그래서 이직 한 곳은
창업 경력을 인정 받아서
6천을 넘게 받았습니다.
몇 년 간은 유지되다가
F1 팀에 가고 싶어서 무작정 영국에 갔어요.
겨울 인데 춥지 않은 곳.
여자들이 속옷을 입지 않는데도
야하지 않은 나라. ㅎㅎ
천국 같았습니다.
맥라렌에 매일 가서 레줌메를 드리밀고
한번 만 만나게 해달라 하고
AMG F1 team, LOLA, 고든머레이 디자인
등등
결론은
영국은 추천이 필요 하더라~
(영국 기술이민 1순위 학위를 귀국 후
8개월 만에 취득 함)
이도시 저도시를 다니며
계속 보이던 것이
경비행기 였습니다.
최근에 캠핑 카라반 이나 보트를 트레일링
하는 것은 가끔 보는데
12년 전 영국은 비행기를 트레일링 하고
다니는 것이 도로에서 자주 목격 되었고
초원이면 대부분 활강하는 것도
자주 목격하게 되었으며
차고 에서는 경비행기를 직접
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국해서 사천으로 갔습니다.
기존 연봉의 반으로 싹뚝 잘려서 갔지만
날아다니는 것들을 보니 마냥 좋았어요.
업무를 하며 저녁에
회사와 연개된 과정으로 석사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항공이란 조립 딱 거기 까지라서
아주 쉽게 뒤돌아 상경을 했지요.
그래도 그 때가 T50 마무리,KUH 실험
KC100 개발, 아파치 동체, 아리랑 위성 등
알짜 정보를 체득 할 수 있었답니다.
올라 와서는 다시 6천 넘게 주는
집에서 15분 거리의
자동차 티어1 에서 근무 하는데
이야~
항공 하다가 자동차 하니
왜 이리 애들이 멍청해 보이고
시스템이 답답한 것인지…
항공분야의 시스템을 뒤늦게 인정했지요.
하자 투성이 자동차 제네시스. ㅎㅎㅎ
전 제네시스 걍 줘도 안 탑니다.
(불안해서 도어트림에 팔도 못 올려요)
한달 동안 하자분석 보고서 작성하여
사장단과 회장 모두에게 하자 터뜨리고
확 뒤집어 버리고 나왔습니다. ㅎㅎㅎ
(이 후 선행 연구소 개설 되었다는 후담)
그리고 이번엔 잠수함 설계 지원을
하러 갔죠.
연봉은 비슷 했지만 파견 수당이 붙었고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선박과 잠수함이 왜 배수량으로
기준 할까요? 이 때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 납품 업체 소속 으로
중공업을 담당하는 업무를 하는
솔루션 회사 였지요.
가족 모두 데려가서 거제도 절벽 위 펜션에
거주하면서 휴식같은 업무의 삶 이었죠.
(신생아 데리고 서울-거제 일주일 마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없으면
사무실에서 하염없이 인터넷 만 다들
보고 있기에 무료해서
관둔다 하니,
재택근무를 하게 배려를 받았습니다.
(기업 최초)
자. 이 때 부터 하루에 한 곳.
7개사 동시 근무가 시작 되었습니다.
(간혹 4대보험 어떻게 했냐고 묻는데
다들 각각 처리 됩니다. 제가 더 많이
낼 뿐이며 세무/회계/법무 상 문제X)
개인 수입이 왠만한 중소기업 매출 이었죠.
하지만
근무는 완벽 했습니다. (물론 자뻑)
애기띠 하고 삼성, 현대, 대우
다 혼자 데이터 지원 다녔습니다.
틈틈히 준비하여 사업자도 여러개.
연구소장도 겸직하고
교수(시간강사) 도 했어요.
“다 되는 구나”
한 5년을 이렇게 보냈네요.
그런데 우연히 출연한 중소기업tv의
제 모습이 김구라 같은 거에요.
불만이 가득한~
브라운관의 제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우울증이 왔습니다.
2년 동안
사람도 만나지 않고
사업도 모두 접고
관리해두던 업체도 모두 퇴사 했지요.
(열심히 가다보면 쉬게 되더라는~강제로)
작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 했습니다.
2, 30 대 에는 년간 1천 만원 씩,
이제는 년간 억대 씩을 상회하며
지금도 발전하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여전히 학교도 다닙니다.
(일부 돈지랄 이라고 하는데 비용 이상으로
분명히 더 많이 알게되고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요즘 세상도 봅니다)
사업을 하면서 프리랜서도 하고
이해관계 만 맞으면 자문과 고문도 합니다.
목표 만 뚜렷하고
미련하게 노력하면 가능 하다는 말 입니다.
지금 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자극 하십시오.
부모님께 1원 한푼 안 받았습니다.
반대하는 결혼 한다고 장손이지만
재산 전부를 형제 자매에게 양도 했습니다.
오로시 제 미련함 하나로
예쁜 여왕님 모시고 공주 왕자와 즐겁게
수십억 짜리 집 매입하고 수억짜리 차 탑니다.
가능하냐고요?
가능 합니다.
이것 뿐 이겠습니까~ 10배 더 나열 할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삶들도 이렇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보고
부모 잘 만나서 물려 받은 돈으로
애들과 놀고 먹는다고 생각 합니다.
자랑이 아니고
“숨기고 싶은 비밀” 입니다.
(오히려 졸부로 보이는게 더 대접받는 사회)
신기하게도 “아빠 법카로 살아요” 하는
애들한테 굽신 거리는 사회 속에서,
누군가가 이 글을 끝까지 읽고
꿈을 키워서 저 보다 더 성공 하기를
바라는 진솔한 마음 입니다.
부모 돈으로,
눈 뜨자 마자 기억나는 것이 학원 이었고
부모 돈으로 유학 다녀와
부모 돈으로 박사 해서
부모 집에서 가족을 의탁하여 살고
부모 소개로 대기업 가서 초봉이 7,8천 인
분들이 분명히 있죠.
그들의 시작이 다르 듯,
우리들은 과정이 다릅니다.
차곡차곡 쌓인 것은 태풍에도 무사 합니다.
나 부터 생각하고
나 부터 사랑하고
나 부터 아껴줘야 합니다.
그래서 나로 부터 시작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이 주말 시간(00:40)에도
가족들을 재우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미련하게.
미련하게 공부하고
미련하게 이직해서
미련하게 가족갖고
미련하게 살아가자!
“나한테 미련하자” 기억 하십시오.
아직도 가능합니다. 지금 뭐 하나요?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