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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자율주행 문제인 줄 알겠다 기사도 짧은데 의도가 보인다 이런 언플할 비용으로 기술투자나 하지 테슬라는 광고 안 함 그게 강한 회사 증거 ___ 주차장 나오던 테슬라 시승車, 여의도 IFC몰 간판 ‘쾅’ 동아일보 업데이트 2026-08-18 16:592026년 8월 18일 16시 59분 조혜선 기자 테슬라 시승차가 서울의 유명 쇼핑센터 간판을 들이받아 3명이 다쳤다. 18일 경찰과 소방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45분경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IFC몰 인근 주차장을 빠져나오던 테슬라 시승 차량이 IFC몰 간판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운전자 등 3명이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찰에 따르면 운전자의 음주나 약물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자율주행으로 인한 사고도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테슬라코리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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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경영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
글로벌 기업인데 브랜드 이미지는 관심 없고요 반복적 법 위반으로 사실상 정부 무시 이럴거면 법은 왜 있나 어차피 무시하고 불법하는데, 나라가 썩은 건 분명하다 이런 것 때문에 안 사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 선진국일수록 윤리소비가 늘어 나는데 현대자동차, 최근 10년여간 공정위 소관 법률 80건 위반 2025.10.15 15:24:23 [출처] 조세금융신문 https://www.tfmedia.co.kr/mobile/article.html?no=196504 “현대차 정의선 불러 청문회…현대위아, 하도급업체 고혈로 황금탑” - 강민국 국민의힘 국회의원 국정감사 - “현대차그룹, 10대 그룹 중 10년간 공정위 소관 법률 압도적 위반” - “현대위아, 발주량 일방 축소로 하도급 업체에 1200억원 손실 입혀” - “2년 동안 협의하며 시간 끌어 희망고문…오죽하면 거래 끊길 각오로 공정위 신고했겠나” 2025-10-29 최창영 기자 [로리더] 강민국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납품 단가 부당지급 등 현대위아의 공정위 소관 법률의 반복적인 위반 사례를 언급하자,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공정위 차원에서 반복되는 법 위반에 대한 가중 처벌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 공정거래법 위반·소비자 피해 접수 최다 류광현 기자 입력 2025.10.28 14:19 하도급법 위반 43건·피해구제 9억882만원…GM 대비 최대 10배 https://www.gnnews24.kr/news/articleView.html?idxno=29788 테슬라 모델Y, 쏘렌토 제치고 국내 판매 1위 5월 판매량 8762대…EV3의 3배 조재현 기자 입력 2026.06.04. 16:39 업데이트 2026.06.04. 18:58 https://www.chosun.com/economy/auto/2026/06/04/WWGEMHOZ5FE37LL3EVVFVZOLAM/
@현대자동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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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 사례] 재벌의 최대적은 재벌: 재벌을 타도하라
요약: 최대의 적은 내면의 자만 - 스스로를 타도하라 오너가 대표가 아닌 직원출신 대표가 개혁 도요타가 변해야 국가가 변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 장착 First Mover로 프리우스 성공 ”도요타가 영원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요타 타도’라는 발상으로 개혁에 착수해 주길 바란다. 최대의 적은 ‘내면의 자만’이다.“ 이런 도요타도 테슬라 중국기업들에 전기차 자율주행에 밀린다 기업도 생노병사로 그 수명이 있다 한국 재벌들도 사라질 날이 온다 완장질과 갑질 범죄로 그 날은 앞당겨질 것이다 ____ “도요타를 타도하라” 전설의 경영자가 남긴 ‘자기혁신’의 경고[딥다이브] 한애란 기자 | 동아일보 2026.08.16. 오전 7:41 세계 1위 자동차 제조사는 일본 도요타죠. 하이브리드 전성시대를 맞이하며 사상 최고 실적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사실 과거 도요타는 ‘돌다리를 두드려도 건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지극히 보수적인 기업이었습니다. 그 체질을 바꾸고 변화에 속도를 내게 된 건 30여 년 전 오쿠다 히로시(奥田碩) 전 사장이 취임하면서부터였죠. ‘강한 도요타’의 상징인 오쿠다 전 사장이 8월 8일 별세하면서 그가 남긴 일화와 어록이 재조명되는데요. 30년 전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통하는 인사이트가 있습니다. ‘도요타를 세계 1등으로 끌어올린 경영자’ 오쿠다 히로시 전 사장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좌천은 도약의 기회다 도요타 본사 경리부에서 필리핀 마닐라 지점으로 발령. 1972년 가을, 오쿠다 히로시의 경력은 완전히 꼬인 듯했습니다. 회계처리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직급 안 가리고 거침없이 캐묻는 그 성질머리 탓에 상사에게 단단히 찍혀서 사실상 좌천당한 거죠.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필리핀 협력업체에 떼인 거액의 부품 대금을 받아내는 것. 협력업체가 배째라로 나온 탓에 전임자 누구도 성공해 내지 못한 일이었는데요. 하지만 그는 책상물림으로 숫자만 들여다보는 경리직원이 아니라, 현장으로 뛰어들어 담판 짓는 배짱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오쿠다는 일개 주재원 신분으로, 최고 권력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재계 인맥을 뚫었고요. 필리핀 대통령궁을 움직여서 대금을 회수해 내는 데 성공했죠. 마침 필리핀을 방문한 도요타 가문의 황태자, 도요타 쇼이치로 부사장이 오쿠다를 만나 이런 활약상을 확인하게 됩니다 .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했죠.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다!” 1979년 오쿠다는 일본 본사로 소환됐고, 이후 도요타 쇼이치로의 심복으로 승승장구합니다. 오쿠다 전 사장은 훗날 인터뷰에서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는데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운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곳을 찾아다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많은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노력한 자에게만 운이 따른다는 얘기죠. 도요타가 변하면 일본이 변한다 1995년 8월, 도요타 다쓰로 사장(도요타 쇼이치로 당시 회장의 동생)이 병으로 쓰러지자 그 자리를 오쿠다 히로시가 이어받았습니다. 도요타에선 28년 만에 도요타 가문이 아닌 비창업가문 출신 사장이 탄생한 거였죠. 오쿠다 사장의 취임 일성은 이거였습니다. “앞으로의 도요타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다.”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한 건데요. 그 시절 도요타는 여전히 품질 면에서 세계 1등이라 자부하는 자동차 제조사였지만, 성장세는 꺾인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내수시장 점유율은 30%대로 뚝 떨어졌고, 엔고로 수익성마저 악화됐죠. 당시 일본 경제는 버블 붕괴로 장기 불황에 빠지면서 자신감을 잃은 지 오래였고요. 도요타 내부엔 ‘이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다’라며 자족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요. 오쿠다 사장은 외부 환경을 핑계로 안주하는 도요타의 ‘대기업병’ 깨부수기 시작했어요.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겼죠. “도요타가 변하면 일본이 변한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19명 임원 중 무려 17명을 한꺼번에 바꾸는 세대교체를 단행합니다. 오너 일가 의중만 살피며 변화에 몸을 사려온 나이 많은 임원들을 자르고, 젊은 인재를 대거 발탁한 거죠.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은 오쿠다 사장의 특장점으로 꼽히는데요. 사장실의 ‘미결 서류함’에는 결재 서류가 남아있을 틈이 없었다고 하죠. 사내에선 ‘사장 책상 위 서류는 1분 만에 사라진다’는 말이 나왔고요. 엘리베이터를 타는 수십 초 동안에 부하가 보고한 계획을 결재했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전해집니다. 그는 “서툴러도 좋으니, 어쨌든 빨리 움직이기 시작하라”며 경영의 속도를 강조했죠. 그 결과, 신중하다 못해 느려터졌던 도요타의 해외 진출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고요. 미국 인디애나 공장과 웨스트버지니아 엔진 공장, 프랑스 발랑시엔 공장 건설이 속도감 있게 추진됩니다. 도요타의 글로벌화가 이때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죠. 무엇보다 오쿠다 사장은 도요타를 업계 리더로 올라서게 만드는 중요한 승부수를 던졌는데요. 바로 세계 최초 하이브리드 차량 ‘프리우스’의 조기 출시였습니다. 21세기에 맞춰 해냈습니다 1995년 10월 도쿄 모터쇼. 도요타 부스 한켠에 선보인 컨셉트카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진 못했습니다. 그 이름은 프리우스. 도요타가 ‘21세기용 승용차’ 프로젝트로 탄생시킨 내연기관과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차량이었죠. 전 세계 어느 자동차 업체에도 없던 신기술이었지만, 당시엔 그게 진짜 조만간 도로를 달릴 수 있으리라 본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개발 과정은 대단히 험난했어요. 같은 해 11월 개발팀이 프로토타입 차량 한 대를 조립했지만 도통 차가 움직이질 않았죠. “시제차가 처음 움직이게 하기까지 49일이 걸렸어요. 갑자기 움직인 건 아니었고, 컴퓨터도, 모터도 점차 개선됐죠. 모터로 5m를 움직이긴 했는데 엔진은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엔진은 시동이 걸렸지만 모터를 동시에 사용하려고 하면 멈춰 버리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나아졌어요. 덜컹거리며 움직였고 500m를 달린 뒤 다시 멈춰버렸죠.” (당시 개발을 맡았던 엔지니어 오기소 사토시의 회고글) 그런데 그해 말 개발팀에 날벼락 같은 일이 닥쳤으니.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쿠다 사장이 “프리우스를 1997년 안에 내놔야 한다”고 통보한 겁니다. ‘21세기용 차량이니까 어떻게든 힘내면 1999년쯤엔 출시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엔지니어들로선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죠. 실무진 사이에 “절대 무리”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오쿠다 사장은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미국 캘리포니아가 1998년부터 초강력 환경규제(무공해차 의무화)를 시행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이었고요. 1997년 12월 일본 교토에선 ‘제3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가 열릴 예정이었죠.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교토로 쏠리는 시점에 맞춰 프리우스를 출시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적자를 각오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2년 뒤인 1997년 12월 10일, 세계 첫 양산형 하이브리드차량 프리우스가 일본에서 출시됐습니다. 가격은 215만엔, 연비는 L당 28㎞이었죠. “21세기에 맞춰서 해냈습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초원 위를 달리는 프리우스의 광고는 큰 화제를 모았고요. 교토 COP3 행사장엔 프리우스가 배치돼 회의 참석자들을 태우면서 도요타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렸어요. “그렇게 복잡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 건가.” 당시 유럽 자동차 제조사의 최고 경영자가 이렇게 감탄했을 정도로 프리우스는 자동차 업계를 뒤흔드는 혁신이었습니다. 이로써 도요타는 글로벌 친환경 차량 경쟁에서 선두주자로 올라서게 됐어요. 이제 도요타의 글로벌 판매량 중 하이브리드차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30년 전 오쿠다 사장 시절의 무모했던 도전이 지금의 세계 1등 도요타로 이어진 셈입니다. 도요타를 타도하라 오쿠다 전 사장의 결단력이 탄생시킨 또 다른 도요타의 히트상품은 소형차 ‘야리스(옛 일본 내수 제품명은 ’비츠)’입니다. 전 세계 누적 판매량 1000만대를 돌파한 도요타의 글로벌 베스트셀링카인데요. 야리스는 젊은층과 유럽 시장을 겨냥해서 개발한 소형 해치백이었습니다. 하지만 1세대 야리스 디자인이 처음 사내에 공개됐을 때 임원들 사이에선 ‘이게 정말 팔릴까?’라는 우려가 많았어요. 기존 도요타 차와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던 데다, 계기판을 대시보드 한가운데로 옮긴 ‘센터 미터’도 파격적이었거든요. 이에 오쿠다 사장은 “이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차”라면서 망설임 없이 이를 승인했고요. 출시 직후 2000년 ‘유럽 올해의 차’로 선정됐을 정도로 대히트를 쳤습니다. 도요타의 포뮬러원(F1) 도전 스토리도 유명한데요. 1997년 6월 오쿠다 사장은 연구개발 거점인 히가시후지 연구소를 방문해 이런 질문을 불쑥 던집니다. “F1은 어때?” F1 참가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뿐만 아니라, 리스크가 상당히 큰 일이죠. 자칫 성적이 엉망이면 된통 망신당할 수 있으니까요.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도요타 사내 분위기상 F1 얘기는 일종의 금기에 가까웠는데요. 이걸 오쿠다 사장이 깬 겁니다. 이제 도요타도 세계적 레이싱 무대에서 실력을 검증받을 때가 됐다는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드러낸 거죠. 오쿠다 사장은 이렇게 말했어요. “F1 그랑프리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과 같은 면이 있습니다. 시대를 이끌어갈 힘이 있죠. 그런 것들이 이끌어가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합니다.” 1999년 1월 F1 참가를 공식 선언한 도요타는 2002년 데뷔전을 치렀고요. 한동안은 별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조롱당하기도 했지만, 2009년 시즌이 되자 잇달아 2위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후 금융위기 여파로 실적이 악화되면서 도요타는 2010년 시즌에 F1 철수를 결정) 오쿠다 히로시의 사장·회장 재임기간(1995~2006년)은 도요타의 극적인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기 도요타 연결 매출액은 2.5배로 불어났고요. 2008년, 마침내 도요타의 연간 판매대수가 사상 최초로 미국 GM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했죠. 하지만 그는 도요타가 잘나가던 시절에도 “도요타가 영원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조직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었어요. 2001년 그의 신년사엔 이런 내용이 담겼죠. “한 사람 한 사람이 경영자의 관점에 서서 ‘도요타 타도’라는 발상으로 개혁에 착수해 주길 바란다. 최대의 적은 ‘내면의 자만’이다. 변혁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도요타의 적은 도요타”라던 오쿠다 전 사장의 통찰. 사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인 모든 기업에 적용되는 말 아닐까요. 점점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요즘, 전설의 경영자가 남긴 어록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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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지게차 운전자들도 희망 가져라, 그것도 잘 하면 더 책임있는 직책 받고 결국 대표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기업에서) 워런버핏의 파트너 찰리 멍거가 가장 사랑한 기업 중 하나가 코스트코이다 주가도 장기 상승을 계속해 왔다.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컨슈머 브랜드 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은 국적이 아니라 좋은 기업 제품 서비스를 소비하면 된다. 많은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기업 코스트코는 한국 재벌기업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 보자. 그리고 현차는 하청업체들 그렇게 쥐어 짜면서도 가격도 비싸다 그래서 테슬라와 중국 전기차들에게 국내 시장을 내줬다 그러면 하청들 쥐어 짜 남긴 돈은 어디로 갔나? 현대차 고정비는, 사업에 영향주지 않고, 지금의 1/3로 줄일 수 있다 그러면 하청들과 상생도 가능하다 5년내로 고정비 1/3로 줄여 줄 수 있다. 세는 돈이 너무 많다 ____ 한국에서 대기업을 이야기하면 삼성, 현대차, SK, LG 같은 재벌기업을 떠올린다. 그러나 기업의 크기와 기업의 품격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기업의 진짜 수준은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리고 창업자가 자신의 회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서 드러난다. 최근 현대위아의 하도급 거래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 재벌기업의 오래된 구조적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협력업체가 대규모 설비투자와 인력채용을 한 뒤 발주량이 줄어들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원재료와 인건비가 상승했음에도 납품단가 인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협력업체가 손실을 떠안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물론 개별 사건의 사실관계와 책임은 법적 절차를 통해 판단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논란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공정위는 현대위아가 경쟁입찰 이후 추가 협상을 통해 납품단가를 낮추고, 귀책사유가 불분명한 비용을 협력업체에 전가한 행위를 하도급법 위반으로 판단하고 제재한 바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별 사건을 넘어 한국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 사이의 구조적인 힘의 불균형을 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은 막대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 협력업체는 특정 대기업에 매출 대부분을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기업이 “가격을 낮춰라.” “설비를 투자해라.” “물량은 우리가 결정한다.” “이 비용도 네가 부담해라.” 라고 하면 협력업체는 싫어도 따르기 쉽다. 대기업에게는 협상력이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특히 협력업체가 대기업의 주문을 믿고 수백억 원을 들여 설비를 증설했다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대기업은 시장 상황에 따라 발주량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협력업체의 공장과 설비는 그대로 남는다. 대기업의 수요 리스크가 협력업체의 고정비 리스크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제조업에서 오랫동안 지적되어 온 갑을관계의 본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업이 있다. 바로 코스트코다. 창업자부터 달랐다 코스트코는 1983년 시애틀에서 James Sinegal과 Jeffrey Brotman이 공동창업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거대한 글로벌 기업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Costco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당시 첫 매장을 열면서 성공한다면 고작 12개 정도의 매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은 사업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여기에서 James Sinegal이라는 창업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Sinegal은 Costco의 공동창업자이자 오랫동안 CEO로 회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가 회사를 키운 뒤 선택한 것은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2012년 CEO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자로 선택한 사람은 자신의 아들이나 가족이 아니라, Costco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Craig Jelinek이었다. Jelinek은 1984년 창고 관리자에서 시작해 Costco의 여러 핵심 업무를 거친 인물이었다. 당시 Sinegal은 그를 후계자로 선택하면서 Costco에는 강력한 기업문화와 깊은 경영진 인재풀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024년 Craig Jelinek이 CEO에서 물러났을 때도 후계자는 창업자의 가족이 아니었다. 다시 Costco 내부에서 성장한 Ron Vachris가 CEO가 됐다. Vachris는 무려 40년 이상 Costco에서 일했으며, 처음에는 지게차 운전자로 입사해 주요 운영과 상품 관련 업무를 두루 경험한 사람이다. Costco는 이를 오랜 기간 준비해온 승계계획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창업자가 회사를 만들고 → 전문경영인이 이어받고 → 다시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자가 승계하는 구조다. 이것이 한국 재벌의 세습과 비교하면 매우 중요한 차이다. 한국 재벌에서는 기업이 아무리 거대해져도 창업자의 자녀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Costco에서는 창업자가 회사를 자신의 가족에게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보기보다, 다음 세대의 경영자가 더 잘 운영해야 하는 기업으로 본 것이다. 물론 창업자 가족이 주식을 보유하거나 상속받는 문제와 경영권 승계는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CEO와 경영권이 창업자의 혈연을 따라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다. 기업을 누구의 것으로 생각하는가에 대한 철학의 차이다. 그리고 협력업체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Costco도 세계적인 거대 기업이다. 수많은 공급업체를 상대로 막대한 구매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공급업체의 납품가격을 최대한 낮춰 자신의 마진을 높일 수도 있다. 그런데 Costco의 기본적인 사업모델은 오히려 반대 방향에 가깝다. 공급업체를 최대한 쥐어짜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의 효율성을 높이고 좋은 상품을 싸게 공급함으로써 고객을 붙잡는 것이다. Costco는 일반적인 유통업체보다 낮은 상품 마진을 유지하고, 대신 회원제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얻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높은 가격 → 높은 마진 이 아니라 낮은 가격 → 고객 만족 → 회원 유지 → 반복 구매 → 장기적인 수익 이라는 구조다. 이 차이는 공급업체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공급업체를 단순히 원가를 깎아야 하는 대상으로 보면 대기업의 이익과 협력업체의 이익은 제로섬이 된다. 대기업이 10원을 더 가져가면 협력업체가 10원을 덜 가져가는 구조다. 그러나 공급망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급업체가 안정적으로 투자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고, Costco가 효율적인 유통을 통해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가 더 좋은 상품을 더 싸게 사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공급업체의 성장과 Costco의 성장이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 것이다. 기업의 힘을 어디에 사용하는가 결국 현대위아와 Costco의 대비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특정 기업의 선악이 아니다. 기업의 힘을 어디에 사용하는가다. 대기업은 협력업체보다 훨씬 강하다. 그 힘으로 협력업체의 마진을 최대한 빼앗을 수도 있다. 설비투자 위험을 협력업체에 넘길 수도 있다. 원재료 가격 상승을 협력업체가 알아서 감당하도록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 힘으로 규모의 경제를 만들고 공급망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도 있다. 둘 다 자본주의 기업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결과가 다르다. 협력업체를 계속 압박하면 단기적으로는 원가가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협력업체가 투자할 여력을 잃고, 좋은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경쟁력을 잃으면 대기업도 피해를 본다. 반대로 협력업체가 성장하고 기술과 생산성이 향상되면 대기업도 더 좋은 제품과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다. 진짜 대기업의 경쟁력은 약한 기업을 얼마나 많이 누를 수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강한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느냐에 있다. 그래서 Costco가 한국 재벌에 주는 교훈 한국 재벌의 문제를 단순히 “오너 일가가 나쁘다”라고 볼 필요는 없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기업은 오너 일가의 재산인가, 아니면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의 경제적 시스템인가? 창업자의 자녀가 경영을 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권이 이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기업이 커질수록 더 엄격하게 능력과 성과를 기준으로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 Costco는 이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창업자 James Sinegal은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뒤 자녀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는 오랜 기간 회사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Craig Jelinek에게 경영을 맡겼고, Jelinek 이후에도 Costco는 다시 내부에서 성장한 Ron Vachris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회사의 문화와 사업모델도 이어졌다. 사람이 회사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기업문화가 다음 경영자에게 계승된 것이다. 이것이 훨씬 성숙한 자본주의가 아닐까. 기업을 물려주는 것과 기업을 지속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좋은 기업가는 회사를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없어도 더 좋은 사람들이 회사를 계속 성장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국 재벌에게 필요한 것도 단순히 ‘상생’이라는 구호가 아닐 것이다. 협력업체를 쥐어짜야 성장하는 기업이 아니라, 협력업체가 성장해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업. 창업자의 자녀가 경영해야 하는 기업이 아니라, 가장 유능한 사람이 경영해야 하는 기업. 그리고 오너의 단기적인 이익보다 고객과 직원, 협력업체, 주주의 장기적인 가치를 키우는 기업. Costco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싸게 파는 유통업체’의 성공모델이 아니다. 기업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강한 기업이 되는 것과 약한 상대에게 강한 기업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진짜 강한 기업은 약자를 눌러서 강해지는 기업이 아니라, 주변의 기업들을 강하게 만들어도 자신이 더 강해지는 기업이다. 그리고 진짜 좋은 창업자는 회사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에도 회사가 더 잘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주)코스트코코리아
Matrix
쌍 따봉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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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ai 발전 속도 체감이 안되는 이유
사용자의 수준이 낮아서 본인 얘기임 😂
복불복
0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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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4.19의거 5,18민주화 운동
모두 민중들의 궐기로 시작되고 비극적인 상황으로 마무리된 역사였지요 역사적 배경은 굳이 차치하더라도 답답하네요 역사적 사건을. 한인간의 정치적 도약을 위한 논란거린로 전략시켜버리고 그게 가능한 논쟁의 광장이 국회에서 나왔다는게. 더더욱 이더운 여름에 마음을 답닥하게 합니다 신식민지 근대화론의 대가로 알고있는 이영훈교수의 등장은 이 포럼의 본질이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그 속셈도 알수 있을듯 합니다. 아 맥주나 한잔 해야 겠네요
gongza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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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기준 의료제한, 밥그릇줄까봐 의사회 반발, 참이기적이다
나라 복지예산이 너무 증가속도가 빨라 구조조정 중이다 이에 의사회가 반발하고있다 환자들이 여기저기 중복의료행위를 해야 의사들이 돈을번다.. 이걸 효율적으로 고쳐보자는것이다 이것에 의사회가 반발하고있다 한국은 의료선진제도를 도입 검토중이다 즉 ① 영국·노르웨이식 생활권별 의료자원 배치 ↓ 지역 주치의 등록 ↓ 주치의가 지속 관리 ↓ 필요하면 병원 의뢰 ↓ 그러나 다른 지역 의사를 선택할 수 있는 예외/선택권 보장 이렇게 된다면 이미 여러 선진국에서 검증된 모델과 상당히 비슷하다 비교하자면 이렇다 현재 구조 환자가 원하는 의원·병원을 비교적 자유롭게 방문 → 같은 질환으로 여러 의료기관 이용 가능 → 검사·처방·영상검사 반복 가능 → 행위별수가제에서는 진료량이 늘수록 의료기관 수입 증가 →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건강보험 지출 증가 이를 소생활권 → 등록된 일차의료/주치의 → 지속관리 → 필요한 경우 2·3차 병원 의뢰 구조로 바꾸면 정부·건강보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외래 이용, 중복검사, 대형병원 경증환자, 입원 등을 줄일 가능성이 생깁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OECD 비교에서도 한국은 의사 진료 횟수와 병상 이용 등이 높은 국가에 속하고, 고령화 속도까지 매우 빠릅니다. 따라서 정부가 아무 제도 변경 없이 현재 이용 패턴을 유지하면 건강보험 지출 압력이 상당히 커집니다. 하지만 “정부 의료비 삭감 정책”이라고만 해석하면 절반만 맞습니다. 정부가 원하는 것은 대략 비싼 병원·입원·검사 중심 의료비 증가율 ↓ 동네의원·예방·만성질환 관리 지출 ↑ → 결과적으로 장기 의료비 증가속도 ↓ 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가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검사와 처방을 반복하는 것보다 한 주치의가 혈압·당뇨·약물·검사를 통합 관리하면 초기에는 일차의료에 돈을 더 지급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뇌졸중·심근경색·입원 같은 고비용 의료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의료계가 민감하게 보는 부분도 있습니다. 만약 향후 소생활권 + 환자등록제 + 인두제/묶음수가까지 강하게 결합한다면 의료비 통제가 훨씬 쉬워집니다. 현재 행위별수가제는 대략 환자 10번 진료 → 10번 지급 인데, 인두제에 가까워지면 등록환자 1명 → 일정기간 관리비 지급 구조가 됩니다. 결국 의사협회는 지들 밥그릇 줄어드니 그렇다.. 쓰레기들..
화성과지구사이
억대연봉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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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후손 재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들 챙겨 줘라
광복절을 앞두고 묻는다 친일 후손 세력이 너무 강해 과거 청산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최소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친일 후손 재벌들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할 정도의 양심은 보여야 한다. 광복절이 다가오면 친일파 후손에 대한 평가가 반복해서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살아남으려면 일본에 협조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당시 관직에 있었거나 사업을 했다고 모두 친일파로 볼 수 있느냐.” 일리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식민지배 아래에서 권력을 가진 일본인에게 잘못 보이면 고위 관료든 사업가든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생존 문제와 국가 차원의 역사적 평가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군가는 자신의 재산과 목숨까지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 역시 그 희생이 후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줘야 한다. 친일 청산을 현실적으로 완수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이것만큼은 해야 한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최소한 자립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는 것. 그래야 다음 세대가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내가 희생하더라도 국가가 나와 내 가족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의 후손은 가난과 어려움 속에 방치하면서, 권력에 협력했던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사회가 된다면 어떤 메시지를 주겠는가? 권력에 맞서지 말고, 권력에 붙어라.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강자에게 줄을 서라. 이런 선례가 반복되면 국민에게 가장 위험한 학습효과를 남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가 특정 정권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일과 친일 청산을 정치적 구호로 내세워 온 정치세력들이 여러 차례 집권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경제적 자립 문제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해결했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의 보상과 각종 지원이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국가적 책임을 보여주지 못했는가? 친일 청산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잘못을 처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어떤 행동을 장려하고 어떤 행동을 부끄럽게 만드는가라는 사회적 선례를 만드는 것이다. 권력에 협력한 사람은 후손까지 잘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후손까지 가난하게 산다면 다음 세대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것은 단순한 역사 문제가 아니다. 미래의 국가적 위기에서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다. 따라서 친일 청산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최소한 국가 재정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교육·취업·주거·자립을 지원하는 제도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친일 행적이 확인된 집안의 후손이 현재 재벌 등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다면, 그들 역시 독립운동가 후손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지원하는 사회적 책임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정도의 양심과 책임도 요구할 수 없는가? 친일 청산이 어렵다면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도 제대로 살게 하라. 국가가 과거를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다면, 적어도 누가 희생했고 누가 그 희생의 혜택을 누렸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는 세워야 한다. 그것이 광복을 기념하는 국가가 미래 세대에게 보여줘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선례다. ____ [81주년 광복절] 독립운동 결과는 '생활고'…후손 절반, 월 200만원도 못 번다 임재환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26-08-13 14:48:47 수정 2026-08-13 19:41:15 엇갈린 후손들의 삶…친일재산 환수 다시 시동 생활에 만족한다는 응답 6.4%…70% "보훈연금·지원 확대" 오는 12월 친일재산귀속법 시행…재산 처분했더라도 그 대가 환수할 방침 #1906년 10월의 어느 날, 수백년간 대구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철거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이었다. 한국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로 불릴 만큼 일제와 가까웠던 그는 일본인들의 대구 장악을 돕기 위해 인부 60여명을 동원해 읍성을 훼손했다. 이후에도 박중양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관료로 승승장구했고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9년에는 '자제단'을 조직해 3·1 만세운동을 억누르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대구 침산동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으며, 그가 남긴 상당한 재산도 국가 환수가 이뤄지기 전까지 유족들이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후손은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구 출신으로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고(故) 이상정 장군의 손자 이재윤 씨가 대표적이다. 이 씨는 월세 15만원짜리 쪽방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생활해 왔다. 세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오른팔과 다리가 불편한 그는 현재 요양병원에서 지내며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고 토로했다. 광복절 81주년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엇갈린 삶이 재조명받고 있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형성된 재산이 대물림된 사례가 있는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 상당수는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 놓여 있다. ◆ 빈곤에 허덕, 애국지사 후손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열악한 경제적 현실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광복회가 지난해 독립유공자 후손 8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월평균 가구소득이 200만원 미만인 응답자가 443명으로 전체의 52%에 달했다. 낮은 소득은 현재 보훈정책에 대한 평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국가보훈부의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답한 후손은 61.6%로 절반을 훌쩍 넘었다. 가장 시급하게 요구하는 정책 역시 경제적 지원 확대였다. 응답자의 약 70%가 '보훈연금 및 지원 대상 확대'를 최우선 정책 과제로 꼽았다. 경제적 어려움과 부족한 지원은 삶에 대한 만족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한 후손은 6.4%에 그쳤다. 독립운동을 기리고 후손을 예우하기 위한 각종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나, 정작 후손들이 체감하는 지원과 생활 여건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인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은 "친일파 후손들이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은 것과 달리,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선대가 모든 것을 내놓은 탓에 가난을 대물림해 왔다"며 "재산이 없으니 교육받기 어려웠고 안정적인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현재는 후손들이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워 스스로 일어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 법무부, 친일재산 환수 착수 독립운동가 후손 상당수가 생활고를 겪는 현실과 맞물려 친일재산을 적극 환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축적한 재산을 끝까지 추적해 국가에 귀속하고, 이를 독립운동가와 후손의 예우·지원 등에 활용해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를 둘러싼 논란도 친일재산 환수 문제에 불을 지폈다. 일제강점기 의사였던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관련 재산이 후손에게 넘어갔더라도 친일의 대가로 취득했다면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정부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부당하게 축적한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이 오는 12월 3일 시행된다. 환수 대상은 러일전쟁 개전일인 1904년 2월 8일부터 광복일인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다. 해당 법령은 재산이 이미 처분된 경우에도 그 대가를 환수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법무부는 친일 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2010년 활동이 끝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도 16년 만에 다시 구성한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친일재산 환수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사리사욕으로 공동체를 배반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라며 "친일재산귀속법을 통해 반민족 행위자가 부당 축적한 재산을 조사·환수해 책임을 묻고 본보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친일 행위로 만들어진 재산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며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가 세운 나라라는 전제 속에서 친일재산 환수는 국가와 민족의 정통성을 세우는 상징적인 조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Matrix
쌍 따봉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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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에게 일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신입을 겪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신입에게 일을 알려주다 보면 가끔 ai한테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이거 정리해줘”라고 하면 어떤 자료를 보고,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고, 어디에 저장하고, 누구에게 공유할지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야 합니다. 한 번 해본 업무도 상황이 조금만 달라지면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해요?”가 되고요. 신입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명을 겪다 보니 한 가지를 깨닫게 됐습니다. 신입에게 ‘일하는 방법’만 가르치면 계속 가르쳐야 한다는 것. “이럴 땐 이렇게 해.” “저럴 땐 저렇게 해.” 이렇게 정답만 알려주면 새로운 상황이 나올 때마다 또 물어봅니다. 결국 선배가 신입 대신 판단해주는 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다르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 업무에서 뭘 확인해야 할까?” “왜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조건이 바뀌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처음에는 당연히 느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질문이 달라집니다. “이거 어떻게 해요?”가 아니라 “이번에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처리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진짜 일이 조금씩 나뉘기 시작합니다. 결국 신입에게 필요한 건 업무 매뉴얼을 더 자세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업무를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신입이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줄 여유도 필요하고 선배가 처음부터 답을 알려주지 않는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생략하고 계속 정답만 알려주면 신입은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지시사항을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신입에게 일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정확히는, 일을 하는 방법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는지, 무엇을 보고 판단하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게 결국 신입을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에서 ‘스스로 판단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아직 배워가는 입장이라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 여러 신입과 함께 일하며 느낀 점을 한번 적어봤습니다.
설악초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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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늙크크들은 충격받을 ;;의 사용법;;;;
아니 진짜 이게 땀땀;; 이었다고요? 전 진짜 띠꺼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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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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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후손 재벌
한국은 아직도 일본 속국 정도 일본 식민지 할 거면 그냥 미국의 한 주로 편입이 더 좋은 것 아닌가, 그러면 전국민 미국 국민되고, 원정출산 안 가도 되고, 국어가 영어가 되서 언어 해결,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가서 취직을 하던가 사업을 할 수 있고, 맥도날드에서 뜨거운 커피에 피부 화상 입으면 소송으로 큰 금액 배상 받고. 더 이상 쿠데타 걱정 안 해도 되고, 북한으로부터 침공 걱정 안 해도 되고 글 제목을 구굴 (자동 완성) 검색어를 넣으니 다음과 같은 답변 (구글에 따져라) 이러니 동해를 일본해라 국제사회에서 하지. 국제사회가 볼때는 아직도 일본 식민지라 할 수 있지. 프랑스 등은 철저하게 나치 박멸 그리고 세습 재벌에 충성하는 한국인들 = 북한 세습 충성 인민들 서구나 중국 일본이 한국을 절대로 선진국으로 인정 안 하는 이유 - 시골 땅 수용된 갑자기 부자된 정도로 취급 그리고 20년이상 최저출생 최고자살 연금고갈 예정인데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보고 문명국이 아니라 야만국으로 여김 (그들도 다 잘 한 건 아니나 독립 후 나치 처벌은 한국 보다 훨씬 세게 했으니 그런 주장 가능) 따지려면 구글에 해라, 구글엔 겁 나서 말도 못 하면서 ___ ‘친일파 후손 재벌’ (출처: 구글) 친일파 후손과 관련된 재벌 및 대기업은 일제강점기 당시 축적한 자본과 해방 이후의 혼맥(결혼)을 통해 현재까지 강력한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 소유 기업 및 자산 삼양그룹: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김연수의 후손들이 대대로 경영권을 승계했습니다. 김연수의 후손 12명이 대표 및 임원을 지내며 상장 기업 중 친일파 후손이 가장 많이 포진한 기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원INC (그랜드힐튼 서울): 조선 왕족 출신이자 일제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 회장이 경영권을 꿰찼습니다. 그랜드힐튼 서울호텔이 위치한 서울 홍은동 부지가 바로 이해승이 남긴 친일 재산 기반입니다.대기업 재벌가와의 혼맥(婚脈) 연결친일파 가문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재벌가와 중첩된 결혼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확장했습니다. 삼성그룹과 동아일보 가문: 친일파 김성수의 손자(김재열)와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녀이자 삼성그룹의 차녀인 이서현이 결혼하며 대표적인 재벌가-친일파 후손 간의 혼맥을 형성했습니다. 35개 가문의 결속: 과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가계도를 분석한 결과, 무려 35개 친일 가문이 서로 복잡한 혼맥으로 얽혀 권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친일 재산 환수의 현실적 한계정부는 친일재산귀속법을 통해 이들의 토지와 자산 환수를 추진해 왔으나 법적 허점과 소송으로 인해 환수율은 매우 미미합니다.후손들이 제3자에게 자산을 미리 매각하거나, 법원 경매를 통해 자기 조상의 땅을 합법적으로 되사는 방식으로 재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완용의 증손자는 상속받은 서울 땅을 30억 원에 매각한 뒤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대중 인식조사에서도 국민의 약 48%가 '재벌과 고위공무원 등 기득권층에 친일파 후손이 여전히 많다'는 점을 친일 청산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습니다 ____ 오마이뉴스 혼인으로 힘 키운 친일 후손 "기득권층과 깊게 연결" <뉴스타파> 뿌리 깊은 친일, '친일파 후손 어디서 뭐하고 살까' 좇았다 유성애(findhope) 등록 2015.08.11 18:44수정 2015.08.11 18:44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지 70년이 흘렀다. 당시 일본에 동조했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뉴스타파>가 '해방 70주년' 기획보도로 그들을 추적했다. <뉴스타파>가 조사한 친일파 후손은 현재 1177명. 이들의 직업군을 살펴보면, 기업 대표와 임원이 전체의 약 30%(376명)를 차지했고, 이어 대학교수(191명)·의사(41명)·언론인(46명) 순으로 많았다. 친일 후손 중 346명은 아예 한국 국적을 포기하기도 했다. 친일 후손들 삶의 궤적을 좇는 <뉴스타파> 기획보도 2부 '뿌리 깊은 친일'편이 지난 10일 오후 방송됐다. 취재진이 8개월간 조사한 친일파 후손들이 과거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직종에 진출했는지 등이 담겨 있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차리석(임시정부 국무위원) 장남 차영조씨 등 독립운동가 후손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해 가난에 시달리는 동안, 친일 후손들은 선조의 부를 바탕으로 권세를 누렸다. 조사 결과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381명이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로 불리는 명문대 출신이었다. 서울대 출신 친일 후손은 전체 중 22.8%(268명)에 달했다. 친일 후손 중에는 유학파도 많았다. 친일 후손들은 미국(204명), 일본(52명), 독일(14명) 등 주로 세계 패권 국가들로 유학을 갔다. "일본은 어진 나라라 천하무적"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진 친일파 이명세, 그의 손녀인 이인호 현 KBS 이사장도 친일 후손의 한 사례로 등장했다. 이 이사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제 미국 유학 시절 때 우리 국민 개인당 소득이 50~60불이었는데, 제가 다닌 학교 1년 학비와 기숙사비가 2000불이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내선일체'를 주장한 친일파 서상훈(중추원 참의 33년 연임)의 후손은 세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발행인이던 친일파 방태영의 후손도 모두 미국 시민권자였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이들 후손들에게 '선친의 유산이 성공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이들은 "전혀(아니다), 나는 학교 시험도 다 내가 보고 들어갔다"라는 등 대부분 자수성가를 주장했다. 친일 후손 중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한 사람도 346명에 달했다(직업·신원이 확인된 1177명 이외 사람도 포함). 국적포기자의 수는 친일파 명단이 발표되고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던 2000년대에 특히 많이 늘어났다. 또한, 이들은 국적을 포기하면서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게 됐다. 친일 후손에 '권리는 누리고, 의무는 외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재용 등 친일파 후손 중 기업인은 376명... 결혼으로 가세 확장 일본강점기 '중추원'은 식민지배기구이자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였다. 이곳은 당시 친일 인사들의 집합소로 알려졌다. 중추원 참의는 친일파들이 할 수 있는 최고 직책 중 하나였다. 이들은 현재 어떤 분야에 진출했을까. 친일파 후손 중 가장 비율이 높은 직업은 기업인이다. 1177명 중 기업인은 376명으로, 상장기업 대표 임원 주주가 36.1%에 달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친일파 김신석(중추원 참의)의 외증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있다. 김신석은 친일단체였던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여자들을 정신대(일본군 위안부)에 안심하고 보내라"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장 기업 가운데 친일파 후손이 가장 많은 기업은 삼양 계열사다. 가족 기업인 삼양에서 친일파 김연수의 후손 열두 명이 대표나 임원을 지냈다. 김연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일제 당시 국방헌금 수십만 원을 내면서 "일억일심으로 황국 목적 달성에 매진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금융인 또한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 등 62명에 달했다. 친일 후손들은 결혼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과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발표했던 친일파 1006명의 가계도를 <뉴스타파>가 분석한 결과, 무려 35개 가문이 혼맥(婚脈)으로 얽혀 있었다. 친일파 김성수의 손자인 김재열(동아일보 김병관 회장 차남)과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녀 이서현(삼성그룹 차녀)도 이 사례에 속한다. 친일 집안이 아니더라도 대기업 재벌가와 혼맥을 통해 권세를 굳힌 경우도 있다. 친일파 현준호는 아들 현영원을 당시 재계 실력자였던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시켰다. 김문희는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의 누나다. 현영원-김문희의 딸 현정은은 현대가 5남인 고 정몽헌 회장과 결혼했다. 정치인과 공직자, 법조인, 언론인 등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그룹도 총 163명으로 전체 친일 후손 중 약 14%를 차지했다. 친일 후손은 정치인(31명), 법조인(30명), 공직자(55명) 등 다양했지만 이중 홍석현 전 미국 대사, 이인호 전 핀란드·러시아 대사 등 외교관이 9명으로 특히 많았다. '제4의 권력'으로 불리는 언론사에 근무하는 친일파 후손 또한 <조선일보> 9명, <중앙일보> 8명, <동아일보> 8명, KBS 6명 등이었다. 이른바 '조·중·동'과 KBS가 전체의 2/3를 차지하는 셈이다. 이 밖에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인 김신석의 외손자다. <조선일보> 방일영 전 회장·방상훈 사장은 친일파 방응모의 후손,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김재호 사장 또한 친일파 김성수의 후손이다. 이준식 전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대다수 친일파는 계속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살아남았고 그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자녀 교육이 가능했다, 그게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라면서 "혼맥을 통해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면, 다소 과장해 말할 때 지금 현재 한국사회 이른바 기득권층 중 친일파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진단했다. <뉴스타파>의 송원근 PD와 박중석·심인보 기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의도 아래 이번 4부작 '친일과 망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내레이션 박혜진). 자칫 '연좌제'로 이어질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인 만큼, 지난 7월 전문가 회의를 거쳐 친일 후손 명단의 공개 범위를 정하기도 했다. 1·2부에 이어 3부는 오는 12일 방송된다. 여기서는 친일 후손들이 어디에 살고 있고, 그간 친일 재산은 얼마나 환수됐는지 다룰 예정이다.
@광복회
Matrix
쌍 따봉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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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친일파 하는것들
지금시국에 뭐가중요한지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못하는 것들. 과거엔 일본이 적이었지만 지금은 중국이 가장 위협적인 적이다. 친일친일 할때가아니라 친중을 경계해야하는거다. 모자란 중생들아. 친일을 옹호하는게 아니라 중공을 경계하자는거다. 나라가 야금야금 먹히는게 니들눈엔 안보이니?
아이보리왕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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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안읽씹이 그렇게 죄인가요??
이해가 안돼서 글 씁니다. 제가 원래 카톡을 잘 안 보는 편입니다. 업무 시간에는 회사 메신저도 계속 보니까 피곤하기도 하고 퇴근하면 눈도 머리도 아파서 핸드폰 자체를 좀 내려놓는 편이라 카톡이 와도 바로 확인을 안 합니다. 근데 얼마 전에 친구 한명이 자기 카톡을 계속 안 읽는 게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니고 그냥 카톡을 못 본 거라고 했는데 그건 '안 본 거'라는 겁니다. 솔직히 알림은 봤는데 바로 답하기 애매해서 나중에 답해야지 하고 넘긴 적도 있긴 합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당장 답 안 해도 되는 내용일 때도 있고 생각 좀 하고 답해야 하는 것도 있고 그냥 피곤해서 내일 답해야겠다 싶은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친구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만나면 재밌게 잘 놀다 헤어지거든요. 근데 친구는 카톡을 읽고도 답을 안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읽지도 않는 게 더 기분 나쁘다고 하네요..ㅎㅎ 카톡은 안 읽는데 인스타는 올라오거나 하는 경우를 몇 번 봤다면서.. 헤어진 여자친구들이랑도 이 문제로 자주 다퉜는데 친구까지 그러니 지치네요. 카톡을 받으면 바로 답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읽었다고 바로 답장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연락 스타일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잠수 타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도 합니다. 그냥 사소한 연락에 바로바로 반응하는 게 피곤한 사람일 뿐입니다. 안읽씹 정도는 그냥 각자 연락 스타일의 차이로 봐줄 수 있는 문제 아닌가요...?? 저 같으신 분들 얼마나 계신지 궁금합니다.
copy바라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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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아들이 만든 김치를 드시고 계십니다.
슈퍼네임드 친일파, 을미사변의 주범 우범석의 아들, 우장춘.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접니다.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 정도로 기억하시는 분이 많은데요, 사실 씨없는 수박을 우장춘 박사가 만든 건 아닙니다. 근데 그게 별로 안 중요할 만큼 진짜 업적이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 다른 업적들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글을 써봅니다. 1. 아버지는 을미사변의 주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는데,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을 궁궐로 안내하고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가담한 인물이에요. 사건 후 처벌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서 낳은 첫째 아들이 바로 우장춘입니다. 즉 우장춘은 태어날 때부터 조선을 팔아먹은 역적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달고 시작한 거예요. 심지어 아버지는 우장춘이 다섯 살 때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으러 온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합니다. 아버지 없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한테는 멸시받고, 매국노 자식이라는 이유로 또 손가락질받으며 자란 거죠.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유년기였습니다. 이 배경을 알아야 뒤에 나올 얘기가 더 묵직하게 다가와요. 2. 도쿄제국대학, 그리고 다윈도 몰랐던 것을 증명하다 가난 속에서도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 부설 농학 실과에 들어가 원예육종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세계 학계를 뒤집어놓는 논문을 씁니다. 제목은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 당시까지 진화론의 정설은 이거였어요. "같은 종끼리만 교배해야 자손을 남길 수 있고, 다른 종을 교배하면 자손을 못 낳으니 새로운 종이 나올 수 없다." 종은 아주 오랜 시간 자연선택을 통해서만 서서히 변한다는 게 다윈 이후 학계의 상식이었죠. 우장춘은 배추(B. campestris)와 양배추(B. oleracea)를 교배시켜서, 염색체 수가 배가되면(배수체화)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생식 능력을 가진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실험으로 증명해버립니다. 실제로 유채(B. napus)가 배추와 양배추의 자연 교잡종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고요. 이걸 "종의 합성"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유전학 교과서에 실리는 내용이에요. 배춧과 작물들의 이 게놈 관계를 삼각형으로 그린 걸 우장춘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이 논문으로 1936년, 조선인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여담이지만 그 전 해에는 논문을 완성해가던 농사시험장 본관에 불이 났는데 우장춘이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자료를 꺼내오려다 주변 사람들이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어요.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가죠. 실제로 이 "종의 합성" 이론은 지금까지도 십자화과 식물(배추, 유채, 양배추) 관련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논문이에요. 한국인의 이름이 붙은 과학 이론 중에는 이휘소 박사의 이론과 나란히 놓일 정도로, 해외 과학 교과서에 실제 이름과 이론이 함께 실린 몇 안 되는 사례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후대 평가 중에는 "그가 계속 일본에 남아 연구에만 전념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가능성도 컸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옵니다. 실제로 그의 생애를 다룬 여러 글에서 "독창적인 연구로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컸으나, 한국에서는 당장 시급한 채소 종자 개발에 힘을 쏟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식의 평가가 반복해서 등장하죠. 실력은 이 정도로 인정받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정작 승진은 막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키이 종묘 등에서 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해방을 맞습니다. 3. "아버지의 죄를 씻으려면 조국을 위해 일해라" 해방된 조국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어요. 국내 지식인들이 '우장춘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의 귀국을 추진합니다. 1950년 3월, 우장춘은 가족을 일본에 두고 혼자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독립운동가 김철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매국한 죄를 씻으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절대로 조선인의 성을 갈지 마시오." 이 말이 우장춘에게 깊이 박혔고, 두 사람은 우장춘이 세상을 뜰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부산 동래에 있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처우는 열악했습니다. 박봉에 인력도 부족하고 한국전쟁까지 겹쳐서 상황은 최악이었죠. 심지어 연구원들이 징집 대상이 되자 국방부와 씨름해서 "이 사람들이 있어야 군인들 먹을 식량이 나온다"고 설득해 간신히 면제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늘 낡은 고무신을 신고 다녀서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까지 붙었죠. 4. 그래서 우리가 지금 먹는 것들 우장춘의 진짜 업적은 지금 우리 밥상을 통째로 바꿔놓은 결과물들입니다. - 배추 : 1950년대까지 한국 배추는 얇고 부실해서 김치 담그기도 애매한 수준이었어요. 우장춘 연구팀이 개발한 '원예 2호' 배추가 지금 우리가 아는 속이 꽉 찬 결구배추의 시작입니다. 이게 없었으면 지금의 김치 맛도 없었던 거죠. 이 배추 품종개량은 이후 과학기술 70선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 감귤 : 제주도가 감귤 산지가 된 것도 우장춘이 일본에서 귤나무를 도입해 제주 기후에 맞게 시험재배하고 재배를 권장한 결과입니다. - 감자 : 병에 취약했던 강원도 감자를 무병 씨감자 개발과 시험재배로 개량해서 대관령이 감자 특산지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 무, 벼 등도 병충해 저항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품종개량에 매달렸고요. 그리고 그 유명한 씨없는 수박에 대해 말하자면, 우장춘은 그걸 만든 게 아니라 국내에 처음 들여와 시연한 사람입니다. 당시 농민들이 국내 개량종자를 안 믿고 일본 밀수 종자만 쓰려고 하니까, 새로운 육종 기술을 배우면 이런 신기한 것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충격요법으로 들고 나온 거였죠. 본인이 발명자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언론이 그렇게 대서특필하면서 와전된 겁니다. 오히려 이 오해 때문에 정작 배추, 감귤, 감자 같은 진짜 업적이 가려진 셈이니 좀 억울한 일이죠. 5. 마지막 순간 우장춘은 9년을 오로지 연구에만 쏟다가 1959년 만성 위궤양 악화로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61세. 죽기 직전 병상에서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고는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 라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지금 그의 묘소는 수원 옛 농촌진흥청 자리에 있습니다. 2003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요. 매국노의 아들로 태어나 어디에서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이 결국 자기 손으로 수천만 명의 밥상을 바꿔놓았습니다. 아버지의 죄를 자기가 대신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평생을 조국을 위한 연구에 갈아넣었다는 게 참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삶이죠. 혈통이나 태생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남겼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걸 우장춘의 인생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퇴근이꿈
금 따봉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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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방위: 인면수심자들이 많다
인간은 도덕성을 포기하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개와 다를게 없다 (개를 인간보다 더 중시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엄격한 기준에 총기 소지를 허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랬다면 저런 것은 쏴 버리면 되었을 것이다 피해자가 30대 여성이라 하는 것 같던데… 남성다움을 내세우는 것들은 대체로 폭력 아님 성범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된다 한국은 군대를 지원제로 바꿔야 선진국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 온갖 쓰레기 군대 문화가 세상을 오몀시킨다 ____ 친족 성폭력 알리자 찾아와 폭행‥흉기로 맞선 조카 '정당방위' 입력 2026-08-12 09:56 | 수정 2026-08-12 09:56 과거 삼촌에게 성추행당했다고 폭로하자, 찾아와 주먹을 휘두른 삼촌에게 조카가 흉기를 들어 맞선 행위는 정당행위로 볼 수 있다고 대법원이 판단했습니다. 대법원 1부는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에 돌려보냈습니다. 지난 2023년 1월 A 씨는 76살 삼촌으로부터 어린 시절 성추행당한 사실이 있다며 가족들에게 폭로했습니다. 그러자 삼촌은 A 씨 집에 찾아가 주먹을 휘두르고 서랍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이어갔고, A 씨는 흉기를 들어 위협했습니다. 검찰은 A 씨와 삼촌을 각각 특수협박과 상해 혐의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1심에서 A 씨는 벌금 300만 원, 삼촌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고, 2심은 A 씨의 정당행위였다는 주장을 양형에 반영해 선고유예로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A 씨의 행위를 정당행위로 인정해 원심판결을 무죄 취지로 뒤집으며, "A 씨의 행위는 예고 없이 집에 찾아와 폭력을 행사하고 흉기로 협박하는, 부당한 공격에 맞서 수동적, 소극적 차원에서 행한 행위"라고 했습니다. 대법원은 특히 두 사람이 다투게 된 발단과 경위에는 삼촌의 책임이 근원적이고 보다 중하다고 보인다며 "폭행과 위협에 대항해서 한 A 씨의 행위는 그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가볍고 피해의 정도도 A 씨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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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 따봉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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