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악마를 보았다.
3-4.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막걸리의 타격이 너무 크다. 아침 6시에 깨어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창문 밖에서 울려대는 천둥소리 박자에 맞춰 뇌 안의 모든 신경이 춤을 춘다. 예전부터 막걸리 숙취가 지독하긴 했지만, 이번 것은 좀 다르다. 속도 아프고 머리는 누군가 손으로 쥐었다 놨다 하고 있다. 1시간 정도 반신욕을 해도 소용없다. 어쩔 수 없이 두통약을 두 알 털어 넣고 운전대를 잡는다. 사무실 문이 잠겨있다. 비서가 오늘은 출근이 늦다.
의장실 문은 열렸지만 불은 꺼져있다. 김 국장은 궁금해서 의장실을 빼꼼히 들여다본다. 누군가 혼자서 있다. 자세히 보니 비서실장이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김 국장에게 인사한다.
“국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네, 그런데 실장님은 왜 이렇게 계세요? 불도 켜지 않고.”
“잠시 생각 좀 하느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잘 말씀드리고 죄송하다고 하면 풀어질 겁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자꾸 불길한 생각만 들어요.”
“문제는 풀라고 있는 거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국장님도 숙취가 심하실 텐데 업무 시작 전에 조금 쉬시죠.”
김 국장은 비서실장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두통이 심해서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다. 방 비밀번호인‘1004’를 누르자마자 커피믹스 두 개로 속을 달래 본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커피믹스조차 쓰다. 30분 정도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누워 머리 곳곳을 지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숙취에 비서실장 문제까지 겹치니 머릿속이 더 복잡하다.
잠시 잠이 들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시계를 보니 벌써 9시다. 오늘은 과장급 간부 회의가 있는 날이다. 과장들이 우르르 들어오며 어제 과음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지 걱정스레 물어본다. 소문도 참 빠르다.
“아니, 괜찮아요. 막걸리를 마시면 항상 두통 있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1시간 정도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과장들이 돌아가면서 과별 주요 현안에 대해 보고한다. 김 국장은 보고 내내 과장들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솔직히 무슨 내용을 보고하고 있는 건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드디어 홍 과장 차례다. 홍 과장은 어제 조문을 마치고 의장과 함께 식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어떤 얘기를 하는지 자못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운다. 그렇지만 홍 과장은 일상적인 보고만 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홍 과장만 남기고 모두 나가도 좋다고 말한다.
“과장님, 어제 일은 잘 아시죠?”
“네, 제가 옆에 있었으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장님이 왜 비서실장에게 전화로 폭언하셨는지도 아시겠네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의장님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거든요. 다만, 상갓집에서 식사는 하지 않고 밖에서 함께 식사하자고 한 것 빼고는요.”
“그러니깐 저도 그 부분이 궁금해요.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의장님께서 평소에 비서실장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가끔 말씀하셨지만, 어제 같은 상황은 저도 처음 봤어요.”
“홍 과장님도 잘 아시지만, 비서실장은 의장님이 아무리 어려운 민원을 전달해도 기어코 해내는 사람이잖아요. 오로지 의장님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전 알고 있는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의장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아요.”
“물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 다르니 어쩔 수 없겠죠. 그렇지만 과장님이 항상 의장님과 동선을 함께 하시니 잘 좀 달래주세요. 비서실장이 불쌍해 죽겠어요. 아침에 얼굴을 보니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더라고요.”
“저도 기회를 봐서 의장님께 잘 말씀드려 볼게요. 오늘은 서로 만나기 힘들 거예요. 의장님께서 건강검진차 이틀간 휴가를 내셨거든요.”
어제 비서실장이 술자리에서 홍 과장에 대해 말한 것 때문에 오늘따라 홍 과장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달리 확인해 볼 방법이 없어 홍 과장을 돌려보낸다.
출근길에 본 비서실장 모습이 떠올라 온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점심에 얼큰한 해장국을 먹었는데도 속도 풀리지 않고 두통은 계속된다. 온종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5시가 넘었다. 이제 조금은 속도 풀리고 정신이 드는 것 같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김 국장은 비서실장을 부른다. 여전히 풀 죽은 모습으로 김 국장 방으로 들어온다.
“의장님이 오늘 출근하지 않아 뵙지 못했겠네요?”
“아니요. 의장님께서 이틀간 건강검진을 받는데 오늘은 3시쯤 검진이 끝난다고 해서 병원으로 찾아뵈었어요.”
“아, 그랬군요. 일은 잘되었나요?”
김 국장은 속이 타오른다. 그 결과가 궁금해서 조바심이 난다.
“오히려 병원까지 왔다고 더 화를 내시던데요. 지금까지 저를 계속 지켜봐 왔는데 이번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셨어요. 저도 궁금해 미치겠어요.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거든요.”
“아마 아직은 화가 풀리지 않으셔서 그럴 겁니다.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기다려보시죠.”
이런 말로 위로해보지만, 오히려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올라온다.
다음 날 오후 비서실장이 또 김 국장 방에 들어온다.
“국장님, 너무 힘드네요.”
“그사이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저도 답답해서 오늘 의장님 댁까지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었어요. 그런데 의장님은 오히려 집까지 찾아왔다고 오히려 역정을 내시잖아요. 그러면서 저보고 다른 데로 떠나라고 말씀하셨어요. 의장님 성격에 쉽게 풀리지 않을 듯싶어요.”
“그러니 뭐 하러 집에까지 찾아가셨어요. 제가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자고 했잖아요.”
“국장님 말씀은 잘 알겠지만, 저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찾아뵌 것이죠.”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나서볼게요. 비서실장님은 당분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세요.”
김 국장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중재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세상 모든 일에는 왜, 어째서라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
그것을 찾아내면 된다.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