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패션회사 인턴부터 시작해 게임, 미디어커머스, 뷰티, 콘텐츠, 명품 등 다양한 업종의 마케팅을 경험했고, 유능한 지인들이 불러주신 덕분에 이름난 스타트업들에서 일해 볼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 덕에 이전 직장에서는 C레벨이라 불리는 임원 경험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내 능력에 비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고, 아둥바둥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저는 인턴부터 임원까지, 약 12년간 7개의 회사에서 일 했었는데요. 지난 8월, 퇴사를 확정지으며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몇 몇 분들이 연락 주셨고, 좋은 곳에서 합류 제안도 받았지만, 저는 고민 끝에 당분간 '백수'가 되기로 결정 했습니다.
백수, 해 보니 너무 좋더라고요.
늦잠도 자고, 아이들 유치원 등하원도 챙겨줄 수 있고, 넷플릭스도 실컷 볼 수 있었거든요. 미루던 수리남도 정주행하고, 오늘은 아이들과 피아노 학원도 같이 갔었습니다.
평일에 자는 낮잠이 이렇게 행복한건지, 밝은 낮에 맥주가 이렇게 맛있었는지, 아내와 여유롭게 동네 산책 하는게 이렇게 좋았던건지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좋은 건, 마케터로서 그 어느 때 보다도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나'에게 집중해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다는 점' 이 아닐까 합니다.
마케팅이라는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생각을 덮어두고, 고객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는게 정말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저에게 금전적 혜택을 제공해 주는 곳이 없다보니 지난 12년의 마케터 생활 중 그 어느 때보다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모든걸 볼 수 있게 된 기분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냥 지나치거나 크게 신경 못 쓰던 타사의 마케팅 활동들도, 지금은 그걸 하게 된 배경이나 내부 상황이 더 잘 예상 되더라고요. '내가 했던 것들도 이렇게 본 분들이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생계를 이어가야 하면서도 게을러지기 쉬운 생활이다보니, 스스로에게 어떤 미션을 주고, 불안감과 압박감을 활용하고, 보상을 주고, 결과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온전히 스스로 해 나가는 과정이 나름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더라고요. 12년간 고객을 이해하려고만 했지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참 없었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굉장히 오랜만에 스스로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걸 토대로 나 자신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가는게 재미있기도 합니다. '나'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몰랐었는데, 그 동안 어떻게 남을 이해하려고 들었나 반성도 하는 중 입니다.
물론 엄청나게 불안하고, 또 불안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외벌이 가장이고, 금수저 집안도 아니라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도 합니다. (안 보려고 해도 하루에 한번씩은 꼭 통장 잔고를 확인하게 됩니다ㅠㅠ) 하지만 하루 하루 지날수록 마케팅이라는 일을 계속 하고, 더 잘 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시간이었고,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수'.
마케터가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마케터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한번은 꼭 추천하고 싶은 직업이자 경험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백수로서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할 수 있도록, 그리고 불안감도 완화하고자 현재는 프리랜서 마케터로 몇 몇 회사들을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작은 사업도 준비해 보고 있고요.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의 백수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저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스스로 '백수'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마케팅 하던 직장인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한 번은 꼭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 바로 '백수'가 아닐까 싶거든요.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