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그 날의 일을 마무리짓지 않고 퇴근한다]
하루 업무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퇴근하면 그 사람은 하수입니다. 고수는 일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않고 조금 남겨 둡니다. 퇴근 무렵 상사가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됐나요?’라고 물을 때 ‘지금 막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의기양양 칼퇴근 하는 모습! 생각만 해도 쿨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안됩니다. 일은 빠르게 완료짓기 보다 살짝 남겨둘 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일을 남겨두는 것의 첫번째 장점은 다음날 새로운 관점에서 업무를 다시금 살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서 어제 제출하려 했던 보고서를 다시 살펴 보면 아차 싶을 때가 많습니다. 어제는 분명 보이지 않던 헛점들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만약 그대로 제출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서둘러서 문서의 흐름을 다시 잡고 논리를 보강합니다.
이런 경험을 몇번 하다보면 중요한 메일 역시 하루 묵혔다가 보내는 습관이 생깁니다. 일단 메일을 쓰고 임시보관함에 저장해 둡니다.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큰일 날 뻔 했다’라는 소리가 육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지나치게 나 자신의 논리에 함몰돼 있거나 감정 섞인 내용이 그제서야 보입니다. 하룻밤의 텀을 두고 다시금 산출물을 훑어보는 행위가 이처럼 ‘사고’를 막아 줍니다.
일을 마무리 짓지 말라는 것이 산출물 제출 시점에 한 텀의 여유를 갖고 돌아보자는 뜻만은 아닙니다. 저는 일상적인 업무도 퇴근 시간이 되면 두부 썰듯 딱 잘라 끊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한 챕터를 마무리 짓고 기분좋게 퇴근하는 것을 선호했었습니다. 한 덩어리의 일을 다 끝내기 위해서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일을 남겨두는 것의 또 다른 장점은 ‘하던 일을 곧바로 이어서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처리라는 것도 가만히 보면,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일단 한번 ‘기승’의 흐름을 타면 중간에 텀이 있더라도 ‘전결’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 기승전결을 깔끔하게 끝내버리고 아침에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려고 하면 일이 손에 잘 안 잡힙니다. 어영부영 동료들과 커피 한잔하면서 수다 떨게 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저는 컴퓨터를 매일 끄지 않습니다. 작업 중이던 브라우저와 오피스 파일을 그대로 열어둔 채 절전 버튼만 누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날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면 바로 퇴근 전 상황으로 연결됩니다. 컴퓨터가 완전히 꺼진 상태라면 부팅을 하고 파일을 찾아 실행하고 브라우저를 띄워서 사이트에 접속해야 합니다. 업무를 위한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인터넷 뉴스에라도 한번 눈길이 가면 시간은 훅 지나가 버립니다. 절전모드는 이런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합니다.
출근 후 얼마나 빠르게 업무 모드에 돌입하느냐가 오전의 품질을 결정 짓습니다. 착석 후 5분 안에 완벽한 몰입을 만들 수 있다면 점심 때까지는 타임머신을 탄 듯 훌쩍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오전을 보냈다면 오후에 새로운 일에 대한 착수도 쉬워집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공교롭게(?) 퇴근 무렵 일이 딱 마무리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저는 머리를 쓰지 않는 단순 반복형 일을 책상에 펼쳐놓고 퇴근합니다. 이번 달 비용정산, 영수증 처리작업, 노가다성 엑셀작업, 문서의 제본작업 같은 것들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면 아무 생각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기계적으로 작업을 해나갑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업무의 시동을 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작업 거리가 생기면 너무 반갑고, 따로 귀하게 챙겨서 다음날 아침에 의식을 치르듯 해치웁니다.
결론입니다. 퇴근 무렵 몇가지 마무리만 하면 끝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욕심내지 맙시다. 조용히 컴퓨터의 절전버튼을 누르고 이렇게 외치세요. “오케이!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날 출근 후 해야할 일이 명확하고, 쉽고, 바로 이어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최고의 효율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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