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알아가는 오묘함. 하여가

2022.01.11 | 조회수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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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차안에서 EBS Class-E 박상철교수님의 [노화혁명] 강의를 듣다 말고 뜬금 없이 조선 태종께서 지은 시조 [하여가] 한구절이 생각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집에 와 노트북을 열어 ‘이방원 하여가’를 검색했다. 태종이 지은 한시(漢詩) 원문이 궁금했다. 찾았다! 근데 어라! 찾기는 찾았는데 뜻이 내가 알던 시와 다르다! ‘만수산 드렁칡 ~ ’이 아니고 ‘성황당 뒷담 ~’이다. 왜 다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이런들 엇더ᄒᆞ며 져런들 엇더ᄒᆞ료/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ᄒᆞ리/우리도 이ᄀᆞᆺ치 얼거져 백년(百年)ᄭᆡ지 누리리라.”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는 한역되어 전한다(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하여가(何如歌))] 확실히 ‘한역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2가지 시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고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지나 성황당 뒷담이 무너지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그럭저럭 살아보자는 뜻으로 통하는 곳이 있어 저렇게 했나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태종께서 지으셨으면 당연히 한자가 먼저라야 하지 않나? 한글은 1443년 아드님이신 세종대왕께서 1418년 상왕께서 돌아가신 후에 창제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해가 된다. [하여가]는 태종께서 방에 편안히 앉아 집필묵으로 쓰신 것이 아니라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와의 숨막히는 대치상황에서 마주선 채 말로 읊으셨고, 내가 본 “이런들엇더ᄒᆞ며~”는 한글창제 후 후대 사람들이 당시 구전되던 시를 한글로 받아 적은 것이리라! 그래서 해동악부에는 원래 한글로 적혀 있던 것을 ‘한역(漢譯)’하여 적은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시조와 한시의 출처를 찾았다. 근데 시조가 실린 김천택의 고시조집 [청구영언]은 영조4년 1728년 출판이고 한시가 실린 심광세의 [해동악부]는 광해군 9년 1617년 출판되었으니 ‘漢譯’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조는 태종께서 선죽교에 서서 시를 지은 때부터 오늘 저녁 내가 차안에서 읊은 때까지도 계속 ‘만수산 드렁칡이 ~’로 구전되어왔고, 그 중간에 1617년 해동악부에 한자로 번역되어 ‘성황당 뒷담이 ~’로 기록되었다. 그 후 1728년 구전되던 시조 그대로 청구영언에 한글 ‘만수산 드렁칡이~’로 수록된 것이다. 대략 이 정도까지 정리했을 때, [이방원은 과연 [하여가]를 읊었을까]라는 제목의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기사를 읽었다. 태종이 읊은 거 아니란다. 애써 조각조각 맞추었더니 헛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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