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안장을 진 말과 수많은 사람들이 한곳을 향해 달렸고,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가 날아왔다. 평온하던 들판에는 흙먼지가 일었고, 사방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놓은 것처럼 귀를 찌르는 굉음이 계속되었다. 피가 튀고 광기가 날뛰는, 이곳은 진짜 전쟁터였다. '아. 또 꿈이구나. 염병.' 이대리는 꿈이란 걸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꿈에서 완전히 깨어날 순 없었다. 아직까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꿈은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게 하는 신비한 무언가가 있다. 이대리는 전우(?) 들과 함께 목적지로 달려갔고,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지금 여기가 조선시대임을 짐작했다. 하지만 창이 너무 무거웠는지 어정쩡하게 달리던 이대리는 이내 넘어지고 말았고, 뒤따라 오던 한 전우가 고맙게도 이대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대리는 꿈이지만 감사한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감..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던 이대리가 본 전우의 얼굴은 특이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검은 얼굴, 2m는 되어 보이는 키, 심술이 나 있는 것 같은 표정, 터질듯한 근육, 끝이 휘어진 창...... 어? 이 사람 누구더라? 아.. 그... 여포? 아닌가? 삼국지에? "져 스 워더 밍피엔." "예...예?" "니 찌야오 셤머 밍즈." "예??" "워 쓰 한궈런. 날리날리." 알 수 없는 말로 인사를 한 뒤, 여포는 이대리를 두고 쿨하게 일어났는데, 그가 숨을 쉴때마다 투구에 달린 화려한 장식이 흔들렸으며, 그의 눈은 쳐다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는 이대리를 뒤로한 채, 이내 장비는 다시 적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합을 넣으면서 달려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설 속 여포였다. "이야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아! 으아아! " -- -- 번쩍. 이대리는 눈을 떴다. 하늘에서 화살은 날아다니지 않았고, 천장 귀퉁이가 약간 누래진, 4년째 살고 있는 이대리의 자취방이 틀림없었으므로 이대리는 안심했다. 천장 가운데에는 아직까지 누가 붙여놓은 지 모르겠는 야광 별이 있었다. 이대리는 멍청하게 그 야광 별을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집어 몇 시인지 확인했다. 'AM 4:14' '으, 그래도 3시간은 더 잘 수 있겠네... 개꿀...' 3시간 단위로 잠을 자는 걸 좋아하는 이대리는, 꿈을 꿔도 무슨 여포 꿈을 꾸냐..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새벽에 깬 여느 날처럼 금방 다시 잠에 들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으아! 으아아!" '뭐지?' '꿈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여포가 아직도 살아있나?'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이대리는 꿈결에 잘못 들었나 했지만, 분명 나는 소리였다. 그것도 주기적으로. 창밖에서 누가 싸우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힘겹게 들어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내다봤지만, 새벽 4시의 길거리는 밤벌레 소리만 울려 퍼졌다. 분명 밖은 아니고, 방금 소리는 뭐지... "으아!" 옆방이었다. 잠결이라 잘 몰랐지만, 바로 옆방에서 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멍청하게 듣다 보니 남자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여자의 목소리도 간간이 나곤 했는데, 옆방에 사는 여포와 초선은 이대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계속 뱉어냈다. "하오마? 진더시 하오마?" "하오 치 러!" 이래서 중국 전쟁터 꿈을 꿨구나. 하긴, 군대 전역하고 지겹도록 꾸던 한국 군대 꿈이 아닌 것이 이상하긴 했다. 21세기 한국에 부활한 방구석 여포는 이대리가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초선과 격렬한 사랑을 나눴고,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 지 이대리는 벽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대리는 자신의 원룸이 중국어 배우기엔 최고의 방이겠다는 쓸모없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도 점점 열이 받기 시작했는데 그건 이대리의 잠이 깨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무슨 여기가 모텔인 줄 아나..' '낮 4시도 아니고 새벽 4시인데.. 방끼리 시차가 있나..'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너무 열받네. 저번이 말까지 했는데.' '한국 총각김치의 매운맛 한번 보여줄까..' 하지만 순간 이대리의 머릿속에 '층간 소음으로 이웃 간 칼부림' 같은 흉흉한 기사제목이 스쳐 지나갔고, 저번에 언뜻 봤던 이웃집 남자 팔뚝의 문신이 생각났다. 이대리는 칼에 맞기 싫었고, 강자 앞에서 분노조절을 잘 하는 편이었다. '어휴, 참자 참어... 이 방구석도 조금 있으면 끝이다...' "으아!" "오우! 워 아이 니!" "으아아! 미친놈들아!!" 계속되는 중국어 듣기 평가에 이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여포와 초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른 탓에 되려 잠이 다 깨 버린 이대리는 다시 멍청하게 야광 별을 쳐다보다 이내 유튜브를 켰다. 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영상이 계속해서 지나갔고, 이내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 아침 7시.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 -- '어으 피곤해.....' 어제도 야근을 하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4시간 남짓 잔 뒤 여포 장군의 포효에 깬 하루가 개운할 리 없었다. 또, 이런 날엔 유난히 지하철에 사람이 많았다. "아아, 이번 역은 낙성대, 강감찬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야, 너 이번에 공무원 시험 붙었다며? 합격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낙성대역 2번 출구에...." 지하철 문이 열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는데, 오늘따라 엄청나게 큰 백팩을 멘 아저씨가 이대리의 앞에 와서 섰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채 큰 백팩을 멘 것을 보면 어디 관악산으로 출근이라도 하시는 듯싶었고, 아저씨의 복장을 보니, 힘이 들 때마다 '열정! 열정! 열정!'을 외칠 것만 같은, 영락없는 산악회 아저씨였다. 문이 닫힌 후, 열정 아저씨는 타자마자 노선도를 유심히 보더니,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반대로 탄 것이리라. 맞습니다 아버님. 관악산은 반대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조급해진 열정맨은 지하철이 도착하기도 전에 내릴 준비를 했고, 사당역 문이 열리자마자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툭. 열정맨은 급하게 내리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면 지하철에서 내렸고, 그때 그의 김밥, 손수건, 와이프가 싸준 결명자차, 무릎 아대, 정상에서 마실 소주, 중턱에서 먹을 장수 사과.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묵직한 가방이 이대리의 어깨를 세게 쳤다. 이대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상태였고, 순간적으로 손에서 그것을 놓쳤다. 약정은 19개월이 남아 있었다. '안돼! 내 1,350,000원!' 이대리는 순간 초인적인 집중력과 민첩성을 발휘하여 스마트폰을 잡아냈고, 스스로의 민첩함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대리가 할부금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스마트폰을 잡느라 헐렁해진 에어팟 프로를 고쳐 끼우려고 잠깐 뺀 순간, '툭.' 마지막에 내리던 누군가가 이대리의 팔을 (또) 치고 지나가, 에어팟 프로는 순식간에 승강장과 열차 사이로 떨어졌다. 머릿속에 '이번 역은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습니다.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수백 번도 더 들었을 방송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 에어팟 떨어뜨리는 것도 조심하라고 해줬어야죠 기관사님...... 열이 받은 이대리는 바로 고개를 들어 누가 자신의 팔을 쳤는지 보려고 했지만, 역시 어림도 없었다.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한 데 뒤엉켜 목적지로 향하고 있어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가, 저 아줌마가, 저 앞의 학생이 친 것 같기도 했으므로 이대리는 어디 화를 풀 곳조차 없었다. 이대리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오늘만 해도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 "이대리, 회의실 다 세팅됐지?" "넵. 프로젝터랑 zoom이랑 다 세팅 해놨습니다. " 오늘은 이대리네 팀에서 외국 바이어와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외국 바이어는 두바이 사람들이었는데, 굉장히 예의를 따지고 절차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라 김부장도, 박차장도 신경을 많이 쓰는 클라이언트였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직접 두바이로 가서 대면회의는 하지 못하고 화상회의로 대체되었지만, 그것이 이 회의를 좀 더 편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김부장은 완벽한 회의 준비를 요구했고, 중간에 화상회의가 끊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므로 막내인 이대리는 장비를 점검, 또 점검했다. 이번 주 동안은 여자친구보다 IT 팀 박대리와 통화를 더 많이 한 이대리였다. 이대리네 팀이 일주일 내내 야근까지 하며 준비했던 회의가 곧 시작되었고, 영어를 잘 하는 김부장이 회의를 능숙하게 주도해갔다. 미국에 사는 둘째 아들은 한국말을 잘 못하는 탓에 몇 년 전부터야 급히 배운 영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사실 그 회의에서 이대리가 할 일은 딱히 없었으므로 이대리는 다시 '열일모드'를 발동하여 노트북을 가만히 쳐다보며 집중하는 척을 했고,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에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The service is unique. It is really...." "찐! 찐! 찐! 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나른한 오후에 진행되던 회의에 난데없이 트로트가 울려 퍼지자, 이대리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방금 구글이 really를 자동으로 번역해 준 건가?' '뭐지 이 상황은?' '저쪽 사람들도 되게 놀란 것 같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던 이대리는 두바이 사람들 앞에서 울려 퍼진 코리안-트래디셔널-송 덕분에 정신이 확 돌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내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트로트는 이대리의 알람이었기 때문이다. '꺼져라. 꺼져라. 꺼져라. 꺼져라.' 이대리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알람을 껐지만, 이미 '찐이야'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한 번 재생이 된 후였다. 이대리가 두바이 사람들 앞에서 K-POP을 선보이는 것은 그의 커리어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이대리의 얼굴은 회의실 책상 색깔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적막이 흐르는 회의실에 이대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쏘.. 쏘리..." 작은 해프닝 (으로 기억되길 소망하며)이 일어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저건 뭐 하는 새끼지..라는 팀원들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스크린 너머의 두바이 사람들도 이대리는 스튜핏 코리안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대리네 회사는 매월 세스코 직원들이 와서 소독, 방역을 했으므로 이대리가 들어갈만한 큰 쥐구멍은 없을 것이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이대리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울고 싶은 하루였다. -- "넵.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세요~" 이대리의 선배들은 이대리의 '찐이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혼냈으면 좋겠는데.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된 후, 이대리는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해야 했는데, 오늘 저녁은 여자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를 준비한다고 2주일은 만나지 못했던 여자친구였고, 회의가 끝났으므로 오늘 저녁에는 꼭 보자고 몇 번이나 달래줘야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길어진 회의에 이대리의 퇴근 또한 예상보다 늦어졌고, 약속시간에 맞춰서 가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심지어 오늘 만나기로 한 곳은 두 번이나 환승을 해야 하는 곳이었으므로, 지옥철 환승을 감안하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해야 하는 이대리였다. '아, 그냥 택시 탈까...' 이대리는 네이버 지도에 예상 도착시간을 찍어봤고, 퇴근길임에도 불구하고 도착시간은 지하철과 얼추 비슷하게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 두 번이나 환승을 하는 시간까지 고려한 것이리라.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낸 이대리는 택시를 타기로 결심했고, 교차로 귀퉁이에서 손을 휘적거려 택시를 잡았다. 지금 바로 가면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 "기사님, 많이 남았어요?" "글쎄요, 나도 모르겠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다리 위에서 사고가 나가지구우~?" "하..." 이대리는 해가 지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매번 보지만 매번 마음을 뺏길만한 황홀한 풍경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하늘이 그라데이션으로 물들 때, 아무리 좋은 포토샵으로도 구현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총천연색의 색깔이 하늘이란 도화지에 얇게 펴 발라졌고, 그 아래에 인간들이 지은 높고 낮은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을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한강과, 유람선과, 다리 위의 지하철. 이대리는 이 모습을 서울의 몇 없는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약속에 늦지 않았을 때 이야기였다. 이대리는 이 풍경을 40분째 보고 있었다. "25분 교통정보입니다. 반포대교 부근이 심한 정체인데요, 나들목 부근에서 트럭과 버스, 택시의 3중 추돌사고가 일어나 한 차로만 운행되고 있어 정체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교통정보에서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고, 이대리는 귀로 교통정보를 들으며 손가락으로는 여자친구에게 거의 빌다시피 카톡을 하고 있었다. 단어와 문장은 달라졌지만, 결국 모든 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으므로 여자친구는 슬슬 지치는 것 같았다. '진짜 미안.. 아직도 뚫릴 생각을 안 하네.. 사고가 진짜 크게 났나 봐..' '오빠, 그냥 오늘 우리 만나지 말고 쉴까? 나 여기서 집 가면 그렇게 멀지도 않고, 지금 우리 본다고 해도, 밥 먹으면 10시 다 될 것 같아. ' '진짜...? 너 너무 오래 기다렸는데 괜찮아...? 이거 다리만 건너면 금방 갈 것 같긴 한데...' '아냐아냐. 그거 언제 뚫릴 줄 알고. 오늘 그냥 좀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네. 오빠도 요새 며칠 내내 야근했잖아. 들어가서 쉬어. ' '알겠어... 들어가서 연락해..." "응, 오빠도 택시에서 고생인데 어서 들어가. 집 도착해서 연락할게.' 여자친구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고, 이대리는 노을이 지는 반포대교 위에서 망연자실한 채 한강을 바라봤다. 뭐 하나 풀리는 게 없는 하루였다. -- 지친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온 이대리는, 가방과 겉옷, 양말을 허물처럼 벗으며 침대로 직진했다. 이대리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면 그 허물들로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동선을 그리며 널브러져 있는 껍데기들을 보면서 이대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도 이런 하루가 있나 싶을 정도로 운수 없는 하루였기 때문이다. 이대리는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더럽게 눈치 없는 배는 자꾸 음식을 달라고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게 나이가 들수록 배꼽시계만 발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띵동~" "누구세요~" "배달이요~" 이대리는 허겁지겁 나가 돌아오는 길에 미리 주문한 배달음식을 받았고, 십수 년 자취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정확한 배달 도착시간을 잰 자신이 잠시나마 자랑스러웠다. 피곤하고 배가 고팠던 이대리는 허겁지겁 비닐봉지를 뜯었고, 다이소에서 5천 원에 산 밥상을 펴 그 위에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되지 않는 반찬을 내려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메인 요리인 쭈구미볶음을 열어 첫 숟가락을 뜬 순간, 이대리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뭔가.. 엄청.. 매운데....?' 다시 한 숟갈 먹어봐도 쭈꾸미는 여전히 매웠고, 이대리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배달 그릇을 유심히 보았다. 뚜껑에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도전! 4단계' 이대리는 매운 것을 아예 못 먹는 체질이어서 조금이라도 매운 것을 먹으면 온 얼굴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이내 입술이 붓고 콧물이 계속 나오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먹든 가장 순한 맛을 주문했고, 당연히 이 쭈꾸미도 1단계를 주문했다. 그런데 도전! 4단계라니. 도전하고 싶지 않은데 난. 이대리는 쭈꾸미 집에 전화를 걸었다. "네~ 쭈구미집입니다~" "아.. 저 방금 풍광 빌라에 쭈꾸미 주문시킨 사람인데요." "네네 고객님." "저 1단계를 시켰는데.. 4단계가 온 것 같아서요.." "어머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만요. 자기야. 아까 저기 풍광 빌라 배달 간 거. 어. 그거 1단계로 가지 않았어? 아니라고? 아.. 바뀌었다고? 아.. 알겠어. 여보세요?" "네." "어머 죄송해요.. 음식이 바뀌어서 간 것 같아요. 저희가 다시 만들어서 보내드릴게요. 그런데 지금 주문이 하도 밀려서.. 라이더 분들 다시 들어오고 하시려면 1시간 후에야 도착할 것 같아요.." "1시간이요...? 하..." 1시간 후면 10시 반이었고, 씻고 누워서 유튜브 보다가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대리는 고단한 하루에 먹을 힘조차 사라진 것을 느끼며, 다 내려놓은 목소리로 쭈꾸미집 사장님에게 대답했다. "그냥 이거 먹을게요. 다음부턴 잘 갖다주세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꼭 이용해 주시면 저희가 제대로 보답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대리는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4단계 매운맛은 먹어봤자 속만 베릴뿐이었고, 좁은 원룸에 따로 먹을 건 없었다. 라면이라도 끓여먹을까 했지만, 이미 모든 의욕이 사라진 후라 그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이대리는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뭐 하루가 이딴 식이냐..' '피곤해 죽겠네..' '진짜 하루 종일 재수 없는 일 밖에 없네...' '으으으으. 8시간 있다가 또 출근해야 하네..' 샤워를 끝낸 이대리는 몸을 슥슥 닦은 뒤 로션을 대충 발랐고, 재빠르게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으므로, 누워서 넷플릭스로 영화나 한편 보다 잠들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이대리는 넷플릭스를 킨 뒤 잠이 잘 올 것 같은 영화를 한 편 골랐고, 다년간의 경험으로 깨우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한 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지만, 지금 와서 움직이는 것이 훨씬 귀찮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재수 없는 하루였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개운해지겠지. 그렇게 이대리가 온몸에 힘을 풀고 스마트폰만을 바라보던 중, 넷플릭스 위로 짧은 알림이 떴다. '[키티코인] 예약 주문이 [+50%]에서 [전량][매도] 체결되었습니다. ' 재수없는 하루라는 건 취소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 같아요. 아아. 감사합니다 주님. 교회 다닐게요. <다음 편에 계속>
회사생활🎁
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22
21년 07월 17일 | 조회수 2,781
이
이용자
억대연봉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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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해파리
억대연봉
21년 07월 17일
재밌는데 이전 글을 한번에 찾아 보기가 힘드네요. 다른 플랫폼을 활용하시는게 재능을 살리시기엔 더 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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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이용자
작성자
21년 07월 17일
조언 감사합니다!
리멤버에선 '벼락거지 이대리'로 검색하시면 되고,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리멤버에선 '벼락거지 이대리'로 검색하시면 되고,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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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리멤버 회원이 되어
모든 댓글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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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리멤버
@멘션된 회사에서 재직했었음
19년 05월 28일
회사에서 풀지 못한 고민,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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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리멤버
@멘션된 회사에서 재직했었음
19년 05월 28일
일하는 사람과 기회를 연결하여 성공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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