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 동, 띵, 동.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남고의 쉬는 시간은 평소보다는 조용했다.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친구, 교실 뒤에서 빗자루로 야구하는 친구, 앞자리에서 수학의 정석 푸는 친구, 각자 모여서 노가리 까는 친구 등등.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수업 시간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달콤한 10분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중 이대리는 주로 노가리를 까는 쪽이었다. 최근까지 같이 곱창을 먹었던 J와 M이 주로 노가리 파트너로 당첨되었는데, 이대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얼굴들을 20년 가까이 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긋지긋한 놈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지긋지긋한 J가 다가와 이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나 어제 오락실에서 나오니까 자전거가 없어져있더라? 두 번째 잃어버린 거라 엄마한테 뒤지게 혼났어. 크크. 자물쇠는 너 야한 거 숨기라고 사줬냐? 자물쇠는 왜 안 채워? 어?! 이젠 안 사줄 거니까 너도 훔치던가 해!! 끄아아아!!! 막 이랬어. 진짜 빡치신 듯. " J네 엄마는 실제로 소리를 잘 질렀고, J는 자기 엄마 흉내를 썩 잘 냈다. 이대리는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븅신. 두 번 잃어버린 거면 네가 잘못했네. 야 그런데, 내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 그냥 길거리마다 자전거 거치대하고 자전거를 설치 해놓고, 돈 좀 받고 빌리게 해 주면 괜찮을 거 같지 않냐? 따로 살 필요 없이, 그냥 필요할 때마다 빌리고 반납하고 하는 거야. 다른 곳에 있는 거치대에 반납할 수도 있고, 월 정액으로도 할 수 있고.. 뭐 그런 식으로." "그럼 길바닥에 다 콘센트를 이어야 되잖아 모질이야. 그게 되겠냐? 그리고 일주일만 지나고 나면 누가 다 가져가고, 자전거 없어져 있을걸? 우리나라는 다른 건 다 안 가져가는데 왜 자전거만 가져가는지 모르겠어. 존나 특이하다니까? " "ㅋㅋㅋㅋㅋ 그런가.. 안 되려나.. 하긴 콘센트 깔고 그러기가 쉽진 않겠네... 그리고 너 말대로 한국에서는 안 되겠다. 중고딩들 자전거 훔치는 거 너무 좋아해. 아, 그래도 아깝네. 이름도 지어놨는데, 따르르릉이라고." "ㅋㅋㅋㅋㅋ 븅신. 이름부터가 개 구리네." 그때, 옆에서 가만히 웃고만 있던 M이 이대리에게 말했다. "ㅋㅋㅋ 아냐,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은데? 사람들 많이 사는 곳이나 지하철 같은 곳에 설치하면 되게 편할 거 같아. 그러지 말고 네가 나중에 한번 해봐. 뭐 기술이야 이과생들이 하겠지." "그렇지! 괜찮지 않냐?? 이거 아이디어라니까? 역시 너 밖에 이런 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니까. 저 새끼는 맨날 부정적이어서 뭘 말할 맛이 안 나. " "그러다가 나중에는 길거리에 충전기 설치해놓고 전기자동차 충전해서 타고 다닌다고 하겠네 븅신 ㅋㅋㅋ 넌 나중에 그거 한다고 돈 빌려달라고 하지나 마라~" "ㅋㅋㅋ 내가 나중에 따르르릉 성공시키면 취직시켜 달라고 나 하지 마라. 난 우리 M만 취직시켜줄 거다. 음... 그 뭐야.. 상무? 상무 같은 걸로. " 이대리가 M에게 악수하며 상무 스카우트 제의를 하자, M은 웃으며 대답했다. "ㅋㅋㅋ 그런데 정말 괜찮은 생각 같은데, 대학 가서 진지하게 해봐. 내가 볼 땐 네가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 아이디어도 좋고. 그리고 성공하면 상무 말고 전무로 취직시켜주고. 전무가 더 높은 거던데. " "ㅋㅋㅋㅋ 그래. 너 맘대로 해라." 그리고 5분 후,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면서 공유 자전거 같은 생각은 이대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학창 시절 떠오르는 생각 대부분이 그렇듯이, 머릿속 한켠에 무심히 던져져 있다가 이내 다시는 찾지 않은 기억으로 그 운명을 달리했다. 이대리가 마냥 웃고 넘겼던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서는, 떼돈을 벌어다 주거나 이대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엄청난 것들도 있었을 것인데, 이대리도 생각만 하고 시도해보지 않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기에 그런 '엄청날 수 있었던' 생각들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들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대리는 그런 것들보다는 수리 나형 4점짜리 문제를 2분 30초 안에 푸는 방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난 것도 지금 이대리가 듣고 있는 소리 때문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이대리와 M은 버스를 타고 15분, 자전거로 25분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이대리는 M을 만나러 갈 때 주로 따릉이를 타고 가곤 했다. '따릉이 이거 내가 20년 전쯤에 먼저 했던 생각인데..' 따릉이의 따르릉 소리를 들으며 되살아난 기억에, 뭔가 그때 따르릉 사업을 하지 않았음이 아쉬웠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란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비웠다. 나처럼 가볍게 생각한 사람이 한국에, 아니 지구에 얼마나 많겠는가. 진짜 했다는 게 대단한 거지. 지금 와서 서울시장한테 소송할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그렇게 줄기차게 해 왔던 수많은 헛소리들에 대해 M만은 이대리에게 항상 성의 있게 답해줬고, 그는 성의 있는 척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친구라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대리는 아직까지 M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친한 친구들 중 둘만 미혼인 데다가 집도 가까우니, 데이트가 없는 오늘 같은 주말에는 따로 약속을 잡지 않더라도 서로를 찾았다. '시간이 좀 남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이대리는, 지하철역 앞의 서점에 잠시 들어갔다. -- '아프지 않게 살아가는 법' '떨어져도 괜찮아. 안아줄게.' '너무 애쓰면 너무 힘들잖아' '힘내지 말고 그냥 살아' '쉬기만 해도 짧은 인생이잖아' '노세노세 청춘이니 노세' '상처받지 않게 살면서 성공하는 법' '죽을 거 같으니까 청춘이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서 있던 이대리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전쟁이 한번 휩쓸고 간 후 모두의 마음에 상처만 남은 나라의 서점인지, 아니면 가벼운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찾아가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책장인지, 그것도 아니면 신이 물벼락을 내리기 직전, 상처받았던 모두가 포도주와 고기를 먹으며 흥청망청하던 어떤 나라의 서점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담 전문의의 서재에 있을 것 같은 책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베스트셀러 코너를 꽉 채우고 있는 모습에, 오랜만에 서점을 찾은 이대리는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요새 다들 사는 게 퍽퍽하니까..' 이대리는 그중 가장 얇아 (만만해) 보이는 책을 골라 펼쳤다. <너무 애쓰면 너무 힘들잖아> 책은 그다지 크지 않아 이대리의 손바닥만 했고, 맨 위쪽의 옅은 보라색 표지를 시작으로, 아래쪽 표지로 갈수록 주황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되는 책 커버가 꽤나 예뻤다. 마치 이대리가 가끔 외근 나갔다 돌아올 때 지하철에서 바라보는 한강 노을 같은 색깔이었다. 책을 펼치자, 큼직큼직하지만 보기 좋은 글씨체로 소제목이 쓰여있었다. 한번 쭈르륵 넘겨보니 큼직한 소제목들이 있고, 거기에 관련된 내용이 2~3장쯤 적혀 있는 형식인 것 같아, 이대리는 무심하게 책을 넘기다가 책 중간쯤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제목 : 나를 사랑할 줄 알기' '스스로를 바꾸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있는 그대로도 아름다운 당신이에요.' '뒤처져도 괜찮습니다. 힘내세요' '가끔은 하늘을 바라보고, 뭘 하고 싶은지 되물어보도록 해요' '어... 음... 뭔가 다 좋은 말이긴 한데... ' 이대리는 갸우뚱하며 책장을 좀 더 넘겨서 다른 챕터를 봤다. '제목 : 우연한 곳에 답이 숨어 있다. ' '유난히 되지 않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팀장님이 말하더군요. 오늘 저녁은 모든 일을 다 멈추고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오자고. 그리고 그날 저녁, 혼자 한강을 걷다 보니 '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결국 그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죠. 기억하세요. 어떤 것에 집중하기보다, 가끔은 쉬어 갈 때 답이 찾아온다는걸. ' 그리고 그 아래에는 고양이가 기지개를 피는 듯한 예쁜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대리가 다른 쪽으로 책을 쭉쭉 넘겨봐도 대부분이 비슷한 내용이고, 제목과 삽화만 총천연색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모두 예쁜 말, 좋은 말, 맞는 말을 써놓긴 했는데, 이대리는 뭔가 알맹이가 없는 말들을 예쁘게 색칠만 해서 모아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그때까지 보던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봐도 내용은 마찬가지였는데, 이대리는 혹시 작가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기까지 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책이 서점에 이름만 바꿔서 서점에 100권은 넘게 있는 것 같았고, 오른쪽 B-8 코너에는 "이 시대의 힐링 도서"라는 별도 책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뭐, 읽을 때는 좋지만 남는 건 없는 거 같은데..' '아니야, 내가 너무 감수성이 부족한 건가..' '그림 잘 그리는 친구만 있으면 나도 저런 책 하나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지. 누군가는 저걸로 위로를 받을 수도 있지.' '근데 인간적으로 이런 책들만 너무 많다. ' 이대리가 베스트셀러에서 흥미를 주는 책을 찾길 포기한 뒤, 경제/경영 코너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조과장이었다. "어어 이대리~ 주말 잘 쉬고 있어? 주말에 미안해~" "아 넵 과장님! 아닙니다. 어쩐 일이세요??" "아, 지금 급히 알려줘야 할 게 있어서. 내가 그 저번에 말한 그거 있잖아. 키티. " "아 네네. 키티코인이요?" "그거, 오늘부터 3~4일, 늦어도 다음 주 내에는 출발한다고 하더라. 이대리도 돈 넣었다고 했잖아 나한테. 그래서 알고 있으라고. " "아..! 드디어 출발하는 건가요.. 흐흐. 넵 알겠습니다. 이거 맨날 폰 보고 있어야겠네요." "그래그래. 한번 쏜다고 했으니까 믿어보자구. 우리 이대리 집 한 채 사야지~" "아 오늘 하이마트 가서 식기세척기 좀 알아봐야겠네요~ 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 아직은 결제는 하지 말고 기다려~ ㅋㅋㅋ " "ㅋㅋㅋㅋㅋ 넵. 알겠습니다. 후.. 기대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장님. " "그래. 주말 잘 보내고~" "네 과장님. 감사합니다~" 서점 한 귀퉁이의 ATM 기계 옆에서 작게 통화하던 이대리는 가슴이 뛰었고, 고개를 돌려보니 책 표지의 곰 한 마리가 웃고 있었고, 책 제목이 이대리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흐흐. 키티코인 가즈아-!' <다음 편에 계속>
회사생활🎁
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19
21년 07월 13일 | 조회수 794
이
이용자
억대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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