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17

이댈
07.10 04:17 | 조회수 1,592 | 좋아요 7
"타다다다다. 타다다닥...." '어으, 졸리다...' 오후 2시 반, 점심을 먹고 들어온 사무실에는 키보드 소리와 졸음만이 가득했다. 쨍쨍한 하늘, 위장 속에 꽉 찬 순두부찌개, 따듯한 날씨, 가득한 이산화탄소.. 사무실 안에 수면 가스라도 풀어놓은 것 마냥 이대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수면 가스 마시면 이런 느낌이구나. 누가 지금 여기다가 풀었을까. 엎드려서 시원하게 잠이라도 잤으면 좋겠는데, 막내인 이대리는 아직까지 엎드려서 잘 짬은 안 된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아. 진짜. 죽을 것 같다. ' '으, 정신 차려야지. 졸려 죽겠는데 주식이나 볼까. ' 이대리는 예전에 팔았던 바이오 주식을 봤다. 차트를 찬찬히 보니, 이대리는 귀신같이 거의 제일 높은 가격에 판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대리가 매도한 이후 그 회사 주가는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해 어느덧 원래 이대리의 평단가보다 낮은 가격까지 내려갔고, 이대리는 시장을 정확히 맞췄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아아, 누가 무릎에 사서 어깨에 팔라고 했던가. 이렇게 좋은 감만 있으면 정수리에서 얼마든지 팔 수 있는데. 승전고를 울렸던 그날의 기억을 뒤로한 채, 이대리는 다시 코인 거래소 웹사이트를 켰다. '자, 이제 주식은 졸업했으니 코인 입장합니다~ " "콜록 콜록. " 그때 김부장의 마른 기침 소리가 들렸다. 업무시간에 코인을 보고 있던 이대리는 괜히 찔린 탓인지,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회사 짬을 발휘해서 "열일 모드" 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 모니터로 들어갈 것 같은 눈빛, 여기서 모니터로 들어갈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약간의 거북목 자세로 타이핑을 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리고 평소보다 키보드는 약간 세게 쳐야 하는데, 여기서 너무 세게 치면 나른한 오후에 김부장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에, 너무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나는 정말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적당한 파워가 필요하다. 그리고 타이핑을 잠시 멈출 때면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쉽지 않은 일이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나의 역량에는 아주 약간 벅찬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결해보겠다는 그 의지를 미간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집중하는 눈빛을 잠시 감으며, '할 수 있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라는 느낌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숨을 내쉰다. 제가 이렇게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절 봐주십쇼 부장님. 하지만 이대리가 쳐다보고 있는 건 키티코인 차트였다. '아직도 출발하진 않은 것 같네..' 그런 이대리의 모습을 흘끗 쳐다본 김부장은, 이내 다시 자신의 모니터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 새끼 주식이나 부동산 보고 있네...' "타다다다닥." 사무실엔 온통 키보드 소리뿐이었다. -- 점심에 조과장과 이야기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임과장을 본 후로 이대리는 회사 생활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이 회사에 어떤 자세로 다녀야 할지, 대리를 단 지금에도 잘 모르겠는 사실이 참 답답했기 때문이다. 이대리는 학창 시절부터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거나 나서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승부욕이 있어 공부든 운동이든 나름 잘 해내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잘 해내는 이유는 95%가 노력이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엉덩이 싸움은 지지 않고 한 덕에 나름 수능을 잘 봤고, 나름 학점을 잘 딴 뒤 취업 시험을 나름 잘 본 결과 나름 좋은 대기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엉덩이로 열심히 해서 나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건 지금까지 이대리가 해온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인 것 같았다. 우선, 어떤 게 유능한 사람인지 그 기준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인사팀 유과장은 회사 사람들 대부분과 관계가 좋고 눈치가 빨라서 유능하다고 했고, 이대리네 팀 임과장은 2주 동안 3시간씩만 자면서 야근해도 끄떡없는 체력이 유능하다고 했다. 홍보팀 남차장은 회장님이 어떤 걸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홍보문구를 쓸 줄 알아서, 재무팀 노대리는 재무팀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재무팀 부장이 예뻐해서 유능(?)하다고 했고, 영업팀 은과장은 소주를 8병씩 마셔도 다음날 8시까지 온다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대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냥 다들 모아놓고 수능 보면 좋겠다. 그럼 간단하긴 할 텐데. ' 이대리 역시 그게 멍청한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물론 혼과 성을 다해서 열심히 하면 팀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일례로 이대리네 팀 임과장이나 김부장처럼 제 몸 하나 불살라 회사일에 바치는 사람은, 그 고생을 모두가 다 알기에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리는 요즘 들어 그런 것에 대해 많은 회의감이 들었다. 저녁 없이, 건강 잃으면서 회사에 헌신하는 것이 너무 가성비가 안 나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과장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어렸지만, 주말 말고는 아이가 자는 모습밖에 못 본다고 했다. 요즘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아빠 모습을 그리면 뒷모습만 그린다던데, 임과장도 나중에 그렇게 뒷모습만 그려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또한 김부장은 아내와 아들 둘이 다 미국에 있는 기러기 아빠였는데, 회사에선 이렇게 인정받지만 집에 가면 혼자서 TV나 보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대리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본인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대리가 느끼기에는 ATM이나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임과장님이나 김부장님은 월급 모아서 대출 끼고 서울에 집이라도 샀으니까.. 일단 저렇게라도 버티는 게 맞는 건가...' '그런데 요즘도 저렇게 버티면 집 살 수 있나..?' '아니지.. 저번에 계산해 봤잖아..' 임과장이나 김부장 시절에도 어려웠겠지만, 이대리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지금 집 사기가 참 퍽퍽하다고 생각했다. 항상 꿈꾸던 드림텔을 인터넷에 검색해 최근 매매가격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열일 모드"에서 나온 한숨과는 다르게 진심이 들어간 한숨이었다. '회사에서 저렇게 건강 망쳐가면서 일해도, 요즘에는 아파트 하나 사기 힘들구나. ' 진짜 적당히 중간만 가면서 회사에서 버티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애사심이고 자아 성취고 모르겠고, 저녁이 있는 삶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집은 투자로 사는 거지~' 임과장과 술을 마신 밤, 지하철에 돌아가는 길에서 이대리는 키티코인을 샀다.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란 것을 느꼈고, 돈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탓에 짧은 인생 동안 하기 싫은 일만 하고 산다면 너무 불행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개나 소나 다 이룬다는 경제적 자유. 이대리는 자기도 못할 것 없다고 생각하며 키티코인에 모아놓은 돈 대부분을 넣었다. 저번 주부터 분할매수한 탓에 그 규모가 꽤 됐다. '후.. 곧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 위아래 변동 없이 가로로만 가고 있는 차트를 보며, 이대리는 차트가 꿈틀꿈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곧 폭발할 것 같은 화산의 꼭대기 땅처럼. 곧 키티코인이라는 화산은 폭발을 앞두고 있었다. 적어도 이대리에게는. '조과장님.. 저 저번 주에 키티코인 들어갔습니다.. ' 이대리는 사내 메신저로 조과장에게 말을 걸었다. '아 진짜? ㅋㅋㅋ 잘 생각하고 한 거지 이대리? 투자는 본인 선택이야~' '넵 당연하죠 ㅎㅎ 저도 좀 알아봤는데 재료가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그래. 작업 들어간 형이 20배는 간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15배쯤에서 빼자. 원래 꾼들 하는 판에는 그러는 거야 ~ ㅋㅋ' '아, 과장님도 계속 들고 계시는 거예요? ' '당연하지 이대리~ 그때 말해준 날보다 한 50% 더 늘렸어.' 이대리가 슬쩍 본 금액보다 더 늘려서 들고 있으면.. 조과장은 거의 십몇억쯤 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 금액에 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뭔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간다. 간다. 곧 간다. '넵 과장님.. 진짜 꼭 대박 나면 좋겠네요. 아자잣!' '그래그래 ㅋㅋ 가즈아! 영차! 영차!' '영차!' '영차!' 이대리는 모니터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 "이번 역은 서울대 입구, 서울대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 이대리는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키티코인을 조금 더 추매했다. 원래 있던 돈이 경제적 자유를 이루기에는 조금 부족한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B(uy)와 D(eath) 사이의 C(oin)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대리는 Coin을 통해 Buy로 가기로 맘을 먹었다. 아직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벌써 부자가 된 것 같은 기쁨이 이대리의 마음에 퍼지기 시작했다. 드림텔 로얄층 사는 것도 꿈이 아니다. '신관악선 연장 철회 공식 확정.. 타당성 검토 결과 13일에 위원회에서 최종 부결' 인터넷을 보던 이대리는 집 앞에 신관악선이 최종적으로 안 들어온다는 기사를 봤다. 이제 곧 이사를 가니 이대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집주인이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참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거기 교통이 헬이긴 한데. '하지만 이제 나는 사당으로 간다. 그리고 곧 드림텔도.. 가야지? 헤헤' 4번 출구로 나가는 이대리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그러니까 조과장, 사실 쉽지 않았겠지만 나한테 말해준 건 잘 한 거야.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지." "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고민하다가..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부장님. " 룸이 있는 참치집에서, 김부장은 조과장에게 사케를 건넸다. "그래그래. 우리 둘 다 알다시피 임과장이 진짜 우직하게 일 잘 하잖아. 특히 올 상반기에 우리 팀 큰 프로젝트 그거, 대부분 임과장이 밤새 가면서 한 거 알잖아. 집도 잘 못 들어가고. 그런데 그렇게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 예전에 그런 잘못을 했었다는 건 조과장이 말 안 해줬으면 아무도 몰랐다~ " "아 넵. 저도 우연히 알았습니다 부장님." "그때 박차장도 같이 한 일이고, 사실 박차장이 시켜서 한 일일 테지만 임과장이 날라간 건 좀 안되긴 했어. 사실 이거 처음 터졌을 때 박차장이 찾아와서 자기가 한 일이라고,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했을 때 그거 뜯어말리느라 고생 좀 했다. 박차장 아들 이번에 대학 들어가고, 작은 딸은 특목고 다니고 있는데, 가족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나 만류했어. 아직 박차장 거래처 라인이 좋아서 박차장이 나가면 회사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아.. 그런가요..? 박차장님이 책임지신다고 한 건 임과장은 아직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 "그런가? 말을 안 했나 보네. 쩝쩝. 어쨌든 조과장 때문에 나도 위에다 할 말이 좀 생겼어. 고마워." "아닙니다 부장님. 그냥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 부장이 내민 술잔을, 조과장은 술잔을 한껏 낮춰서 받았고 이내 참치를 입에 집어넣었다. 얼렸다가 나온 게 아니라, 방금 바다에서 잡은 것처럼 싱싱하고 두툼한 참치였다. '드르륵' "술 더 드릴까요? " "네. 사케 한 병 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드르륵' 조과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김부장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번 상반기 이대리네 팀은 큼직한 프로젝트 하나를 해냈고, 그 프로젝트는 박차장이 지휘하고 임과장이 실질적으로 혼자서 해낸 일이나 다름없었는데, 상무님도 칭찬한 일이니만큼 임과장에게 이번 성과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리고 인사 정책 상 같은 팀에서 과장 모두에게 좋은 성과를 줄 수는 없었다. 임과장과 조과장은 둘 다 내년 승진 대상자였다. 조과장은 꼭 임원이 되고 싶었다. "... 하하하. 아 역시 조과장이 우리 팀에서 제일 웃겨~ 우리 다음 달쯤에 또 라운딩 한번 가야지!" "하하. 네 부장님. 저번에 갔던 곳으로 부킹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하하." '조 과장 이 새끼도 믿을 새끼는 아니구나.. ' 김부장은 23만원짜리 사케를 마시면서 속으로 생각했고, 참치집 룸 안에는 마른 장판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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