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0년 차인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딱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눈치로 유지되고, 결국 통장 잔고 앞에서 끝나는 것. 처음부터 이토록 볼품없는 처지는 아니었다. 서른 남짓 신혼 초, 거실 소파는 온전히 내 차지였고 집은 내 세상이었으며, 아내는 군말 없이 살림을 돌봐주던 사람이었다. 퇴근해 돌아와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헛기침 한 번 섞어 “여보, 재떨이 좀 가져와” 하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되었다. 그러면 아내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손에 닿기 무섭게 척 가져다주곤 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온 집안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절.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책 없이 편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집안의 주도권도 소리 없이 넘어가 버렸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소파에 누워 “여보, 시원한 물 한 잔만…” 하고 입을 뗐다간 즉시 등짝이 서늘해지는 호통이 날아온다.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제 몸 하나 움직이면 어디 덧나? 밖에서 돈 벌어오는 게 유세야?” 그렇다고 돈 버는 일을 멈출 수도, 퇴근 후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일을 멈출 수도 없었다. 매달 쥐꼬리만 한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바치면서도, 돌아오는 퇴근길에는 양손에 분리수거 쓰레기봉투를 꿰차고 아내가 눈을 흘길 때면 현관 들어서자마자 청소기 밀대라도 잡는 시늉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고작 그 정도 손발 움직이는 것을 두고, 나는 돈은 돈대로 벌어오는데 살림까지 짊어져야 하는 처량한 현실이라며 매일 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희미해진 옛 시절을 홀로 곱씹을 뿐이었다. 그날 아침도 출발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툭 물었다. “여보, 오늘 몇 시에 들어와?” “왜?” “그냥 물어보는 거야.” 나는 아내의 그 ‘그냥’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그냥 물어보는 것치고는 언제나 명확한 목적과 셈법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7시쯤.” “정확히.” “한…… 6시 50분.” “왜 10분이나 일찍 말해?” “차가 덜 막힐 수도 있으니까.” “그럼 8시겠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그게 살길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숨 막힐 듯한 적막이 집 안을 감싸고 있었고, 거실에도 주방에도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만 울릴 뿐 받지 않았다. 식탁 위를 보니, 어둑한 불빛 아래 새하얀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보, 나 먼저 떠나요. 이제 당신도 자유롭게 사세요.’ 편지를 세 번이나 곱씹어 읽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하고 당황스러웠고, 그다음에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걱정이 덜컥 밀려왔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묘한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해방감이었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맥주 두 캔을 꺼냈다. TV를 켜고 평소 아내가 옆에서 혀를 차며 싫어하던 축구 중계를 틀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널찍하게 올리고 캔맥주를 단숨에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게 인생이지! 재떨이 안 가져다줘도 돼! 물 안 떠다 줘도 내가 마시면 그만이야!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다!” 나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집이 떠나가라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다음 날 아침, 아내의 잔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밥을 내 손으로 대충 차려 먹고는, 개수대에 그릇을 툭 던져두었다. 청소기? 손도 대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다. 거실 바닥에는 벗어둔 옷가지가 굴러다니고 주방 싱크대에는 설거짓거리가 수북하게 쌓여갔지만,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이 무질서한 자유에 점점 달콤하게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장 출근할 때 신을 양말 한 짝, 갈아입을 속옷 한 장 남아 있지 않았고, 싱크대에서는 쉰내가 진동했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 어설프게 팔을 걷어붙였지만, 평생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살림은 아무리 종일 매달려도 티조차 나지 않고 집 안은 갈수록 난장판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만난 친구 녀석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야, 네 아내 아직도 안 돌아왔냐?” “응, 소식이 없네.” “보고 싶지 않냐? 빈자리가 휑할 텐데.”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도 안 보고 싶어.” “그럼 너 요즘 진짜 살판났네?” “행복하지. 죽을 맛으로 좋아. 그런데...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나는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신혼 때나 편했지, 요즘 집에서 꼼짝없이 잡혀산다고 매일 투덜댔잖아.” 나는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그 잡혀 살던 때가 천국이었어, 이 미련한 놈아! 밥 차리고, 빨래 돌려 널고 개고, 청소하고, 장보고, 공과금 챙겨 내고... 이제 내 수발을 내가 다 들어야 하잖아. 집안일 하느라 하루가 다 가!” 친구 녀석은 마시던 술을 뿜을 뻔하며 배를 잡고 한참을 웃어댔다. 그날 밤,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아내였다. ‘여보, 나 잘 지내고 있어. 당신도 잘 지내지?’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자판을 두드렸다. ‘당신 어디야? 집에 대체 언제 돌아와?’ ‘당신이 정말 나 없이도 잘 사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서, 이제 돌아오는 거야?’ ‘아니. 아직 일주일 더 지켜볼 거야.’ 휴대전화를 맥없이 내려놓으려던 찰나, 연이어 문자가 울렸다. ‘참, 냉장고 맨 아래 칸 야채실 안쪽에 통장 넣어뒀으니 확인해 봐.’ 나는 곧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고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야채실 구석을 뒤졌다. 시든 채소 틈바구니에서 묵직한 통장 하나가 손에 잡혔다. 떨리는 손으로 펼쳐 잔액을 확인한 순간, 진짜로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1억 원. 숫자 1 뒤에 붙은 0을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셌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곧장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이게... 이게 다 무슨 돈이야? 당신 어디서 빚이라도 냈어? 아니면 이거 다 어디서 난 건데?” 수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신이 30년 동안 내 생일이며 명절이며 쥐여주던 돈 한 푼 안 쓰고 모은 거야.” 나는 멍해진 채 전화를 붙들고 말을 더듬었다. “이걸 다...? 여보, 나 주려고 이걸 놔두고 간 거야?” 그때 아내가 차분하게 말을 뚝 잘랐다. “착각하지 마. 그거 당신 주려고 둔 거 아니야. 나 당신 없이도 얼마든지 혼자 잘 살 수 있다는 거 똑똑히 보라고 두고 온 거야.” “그럼 이 큰돈을 대체 어떻게 다 모은 건데?” “명절 용돈에다 당신이 매달 갖다 준 생활비, 콩나물값 백 원 아껴가며 쪼개고 또 쪼개서 모은 내 돈이야.” 나는 30년 세월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아내의 지독한 알뜰함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그래도… 밑천은 내 피 같은 월급에서 나온 거잖아. 엄연히 지분으로 따지면 절반은 내 몫…” 아내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당신 지분? 여보, 결혼 30년 차나 돼서 아직도 그걸 몰라? 당신이 벌어온 월급은 우리 집 생활비고, 내 명의 통장에 들어간 돈은 그냥 내 돈이야. 어디서 감히 숟가락을 얹으려 그래?” 통장 잔고의 주권을 완벽하게 박탈당한 그날 밤, 나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이혼 서류’를 두드려보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서툰 손질 끝에 덜 마른 채 바닥에 뒹구는 짝 잃은 양말과 텅 비어 먼지만 앉은 쌀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현실을 깨달았다. 아내에게는 든든한 1억 원짜리 통장과 완벽한 생활력이 있었지만, 내게 남은 건 빈약한 잔고와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무능한 손발뿐이었다. 결국 나는 알량한 자존심을 접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여보, 언제 돌아와?” “왜? 내가 보고 싶긴 해?” “아니…” “그럼?” “당신 없으니까… 손발이 남아나질 않아. 사람 꼴이 아니야. 너무 불편해 죽겠어.” 아내가 수화기 너머로 깔깔대며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나 진짜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정말?” “응, 정말 보고 싶어. 당신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밀린 집안일 빨래부터 청소까지 전부 다 해줄게.” 그러자 아내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여보.” “응?” “분리수거 몇 번 하고 청소기 잠깐 밀었다고 생색내더니, 그동안 내가 해온 집안일들은 거저 되는 줄 알았던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마침내 도어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튀어 나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여보! 고생 많았어! 어서 들어와, 어서!” 아내는 여행 가방을 내려놓으며 엉망이 된 집 안 꼴을 쓱 둘러보더니, 턱을 치켜들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 이번에 집 비우면서 확실히 정했어. 앞으로 이 집 집안일은 무조건 반반이야. 예외 없어.”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공평하게 가자. 청소랑 빨래는 이제부터 내가 다 도맡을게!” 아내는 그제야 살짝 표정을 풀며 짐을 정리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뱉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바로 팔을 걷어붙이고 거실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담고,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한바탕 해치웠다. 비로소 집 안에 다시 사람 사는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깊은 안도감에 숨을 내쉬며 익숙한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삼십 년 묵은 입버릇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 살겠다… 여보, 나 청소하느라 고생했는데 시원한 물 한 잔만 갖다주면 안 될까?” 순간 안방 문틈으로 나를 쏘아보는 아내의 차가운 눈빛과 딱 마주쳤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몸을 일으켜 부엌 정수기로 걸어갔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온 집안을 호령하던 나의 시절은 아내가 내민 1억 원짜리 통장 잔고와 일주일간의 가사 파업 앞에서 영영 끝났다. 앞으로 남은 세월, 완벽하게 정권이 교체된 이 집에서 무탈하게 살아남으려면 눈치 빠르게 제 앞가림부터 하는 충실한 살림 밑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찬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켜며 뼈저리게 삼켰다.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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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사라진 날
11월 07일 | 조회수 80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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