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제

경고음이 울리는 동안

10월 17일 | 조회수 82
남
남지만작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점을 뚫고 들어가 피를 분출시키고, 생명의 온기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기까지는 숨 한 번 쉬는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기까지 그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평생을 들여다보아도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어둠일지 모른다. 기훈은 그것을 죽고 나서야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죽은 뒤에도 한참 동안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실 천장이었다. 형광등 주변에 연기처럼 희미하게 번진 노란 얼룩. 며칠 전 아내가 걸레를 들고 "여보, 저것 좀 닦아줘요"라고 말했지만, 피곤하다는 핑계로 끝내 손도 대지 않은 자국이었다. 살아서는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던 얼룩이, 죽고 나니 세상의 어떤 풍경보다 선명하게 안구 깊숙이 박혀왔다. 기훈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몸이 움직였으되, 그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 모서리,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허공에 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서야 기훈은 턱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소파 옆 차가운 장판 바닥에 한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회색 셔츠, 구겨진 검은 바지, 그리고 왼쪽 발가락이 삐져나온 양말. 며칠 전 아내가 세탁소 비닐을 벗겨 다리미질해 두었던 그 셔츠였다. 기훈은 홀린 듯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감긴 눈꺼풀 위로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 핏기가 싹 가셔 푸르스름하게 질린 입술. 자신이었다. 그 곁에 아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내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쿵' 소리가 기훈의 영혼을 흔들었다. "여보..." 아내의 목소리는 수중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듯 아득하고 물에 젖어 있었다. "여보, 제발... 대답 좀 해봐요. 여보!" 아내가 그의 차가워진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흔드는 순간,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절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몸이 털썩 주저앉았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달려왔다. "아빠?" 막내가 놀란 눈으로 소파 옆을 바라보다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중학생인 큰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얗게 질린 얼굴로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동자가 떨리는 모습이 기훈의 눈에 낱낱이 들어왔다. "나 여기 있어. 여보, 민우야, 나 여기 있다고!" 기훈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아래로 낙하했다. 아내의 떨리는 손을, 울부짖는 막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아내의 얇은 셔츠를, 따뜻한 피부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아무런 저항도 없는 빈 공기. 그 허망한 감촉을 느낀 순간, 기훈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튕겨 나갔음을. 사람은 죽는 순간 모든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있을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가족의 얼굴, 단 한 번도 깊게 바라보지 않았던 눈빛이 죽고 나서야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비벼댔다. 살아생전 얼마나 많은 말을 '나중에'라는 핑계로 아꼈는지, 아이들과의 약속을 얼마나 가볍게 이월했는지, 수많은 저녁을 피곤하다는 이유로 돌아서 버렸는지. 그리고 내 남편이, 내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가족들이 매일 밤 얼마나 절박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가 죽음이라는 명확한 거울을 통해 비쳐왔다. 아침이 되자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회사였다. 전화기를 든 아내가 잠시 숨을 죽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단어를 뱉어냈다. "남편이...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거실 안을 채웠을 때, 기훈은 이상하게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보고서, 월요일 아침의 부서 회의, 동료와의 점심 약속, 그리고 다음 달 카드값을 걱정하던 너무나도 평범한 직장인. 그 모든 거창하고 분주했던 일상들이, 단 몇 시간 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의미한 껍데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죽어서도 집안을 맴돌며 아내의 눈물과 아이들의 밤잠 못 이루는 뒤척임을 지켜보던 기훈이 집 밖으로 쓸려 나간 것은, 장례가 끝나고 49재가 시작되던 비 내리는 밤이었다. 발길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렸다. 축축한 밤공기를 가르며 다다른 길목에서, 살아생전 뉴스 화면으로나 무심히 접했던 수많은 강력범죄의 현장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붉은 피, 차가운 칼날, 절규하는 비명, 그리고 순식간에 풍비박산 난 가족들. 기훈은 그제야 깨달았다. 살아서는 TV 너머 타인의 비극이라며 혀를 차고 넘어갔던 그 참혹한 현장 속으로, 이제는 죽은 자의 눈이 되어 걸어가고 있음을. 인천의 한 대형 상업시설. 유리 천장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 드는 평범한 점심시간이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국밥집 앞의 길게 늘어선 줄,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에게 늦는다는 전화를 걸며 웃던 여인, 오후 미팅 자료를 확인하며 커피를 마시던 사원들. 누구나 예상 가능한, 평화롭고 나른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래서 비명은 더욱 기습적이었고, 생경했다. "사람 살려! 흉기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한 남자가 길쭉한 칼을 들고 광기 어린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 번째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식당 테이블이 뒤집히고 찌개 그릇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은 제각기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밀치고 도망쳤다. 그 혼비백산의 아수라장 속에서, 한 중년 남자가 식당 의자를 바짝 집어 들었다. 기훈은 그 남자의 손을 보았다. 하얗게 피가 빠져나간 손가락, 도드라진 핏줄, 그리고 떨리는 팔근육. 무서운 것이 당연했다. 저 남자에게도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있을 것이고, 오늘 저녁 함께 밥을 먹기로 한 아이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를 악물고 물러서지 않았다. "오지 마! 들어오지 마!" 범인이 칼을 휘두르며 육박해 오자, 남자는 떨리는 몸으로 의자를 앞으로 내밀며 온몸으로 맞섰다. 그 장면에 시선을 빼앗긴 기훈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죽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 가슴을 울렸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무모함이 아니라, 두려움에 온몸이 떨리고 뼈가 마디마디 깎여 나가는 것 같아도 누군가를 위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슬픈 마음이라는 것을. 그날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영웅이 아니었다. 퇴근길에 맛있는 것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월급을 받아 아이의 학원비를 내며 소소한 행복을 꿈꾸던 평범한 가장들이었다. 왜 아무런 죄도 없는 저들이 목숨을 담보로 칼날 앞에 서야 하는가. 죽은 기훈의 영혼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이었다. 그때, 범인의 발목 바짓단 사이로 드러난 검은색 전자발찌가 기훈의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냉기가 솟구쳤다. '이미 경고가 있었다. 이미 국가와 시스템은 이 남자가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험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는 것과, 그 위험이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실제로 막아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기훈은 허공에서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위치를 모니터에 점으로 띄워놓는다고 해서, 당장 칼을 쥔 사람을 막아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죽은 자의 회한만이 상가 복도의 찬 공기 속에 길게 맴돌았다. 다음 장소는 도로변에 버려지듯 멈춰 선 노란 택시 안이었다. 운전석은 비어 있었으나, 시트에는 기사가 하루 종일 몸을 비벼대며 남긴 묵직한 체온과 땀 냄새가 여전히 자욱했다. 수많은 손때가 타서 반질반질해진 핸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디로 모실까요?"라고 물었을 기사의 나지막하고 고단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뒷좌석 승객은 가방 깊숙이 흉기를 숨기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와 험악한 공기를 채운 기사는 모른 척 백미러를 외면하고 운전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불길함을 외면하지 못하고 나지막이 뒤를 돌아보았다. "손님, 가방에 든 게 뭡니까?" 그 짧은 한마디가 불러온 것은 좁은 차 안에서의 처절한 몸싸움, 피비린내 나는 비명, 그리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기훈은 시공간을 넘어 법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고인석에 앉은 가해자 뒤로, 재판장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해자가 걸어온 고립된 삶, 사업 실패, 질환과 사회적 단절에 대한 참작 사유들이 장대하게 낭독되고 있었다. 기훈 역시 인간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죽어서 가족의 눈물을 지켜본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센 반문이 솟구쳐 올랐다. '가해자의 불행과 서사가 저토록 길고 정성스럽게 읽혀진다면, 사늘한 시신이 되어 말을 잃은 피해자의 삶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방청석 맨 뒷자리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유족의 까맣게 타들어 간 얼굴을 오래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을 분석한다며 가해자의 어두운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정작 목숨을 빼앗긴 이와 그 남겨진 가족들의 파괴된 삶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입을 닫았다. 기훈은 그 참담한 침묵이 견딜 수 없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고통을 이해해 주는 것과 죄의 책임을 묻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야.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짓밟은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어." 그러나 법정은 대답 없이 오직 냉정한 정적과 법률 용어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은평구의 어느 고요한 아파트 복도. 불이 밝게 켜진 문 안쪽에서 목이 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훈은 살아생전 자신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가만히 돌이켜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남자.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고,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무슨 찌개를 먹을지 고민하다 퇴근길 버스에 오르던 하루하루. 죽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것은 어떤 특별한 영웅이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안전하게 누릴 권리 그 자체였다는 것을. 퇴근길에 도어록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지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이웃과 소소한 인사를 나누는 것, 오늘 밤 눈을 감으면 당연히 내일 아침이 온다는 그 무던한 믿음. 그 단단하던 믿음이 일본도라는 무자비한 날밑에 베여 나간 순간, 사라진 것은 한 사람의 숨통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앞으로 누렸어야 할 수많은 아침의 햇살, 아이의 입학식과 졸업식,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을 저녁 식탁, 그리고 아내와 함께 늙어가며 나눴어야 할 무수한 시간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산산조각 나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죽음은 단 몇 초 만에 찾아왔지만, 빼앗긴 시간은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아득한 허공이었다. 구리의 어느 조용한 식당 안. 기훈은 식탁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눈물조차 마른 것 같은 그 조용한 침묵이 허공에 떠 있는 기훈의 영혼을 더욱 매섭게 파고들었다. 아이는 아버지가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고 바닥에 무너져 내리는 모든 과정을 그 작은 눈에 담았다. 기훈은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만져지지 않는 손을 내밀어 아이의 떨리는 뺨을 감싸 안았다. "얘야, 아빠가 그렇게 된 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네가 더 일찍 울지 않아서도, 더 빨리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못해서도 아니야.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단다..."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나, 기훈은 이 아이가 언젠가 아빠의 따뜻했던 손을 기억하며 다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지독한 상처를 가슴에 품고도 다시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죽은 자의 마지막 염원이었다. 어느 깊은 밤, 기훈은 낡은 다세대 주택의 한 방문 앞에 섰다. 방 안에는 겹겹이 쌓인 빚 독촉장과 실직 통지서, 카드값 명세서에 짓눌려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인 남자가 있었다. 살아 있을 때 채권 관련 업무를 접했던 기훈이었다면, 냉정하게 상환 계획을 독촉하는 서류를 내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가난과 외로움 앞에서 무너질 수 있었다. 삶의 무게는 때로 한 인간의 척추를 부러뜨릴 만큼 가혹하니까. 하지만 무너졌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이 피폐하다는 사정이 타인의 삶을 짓밟고 빼앗을 권리가 될 수는 없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롭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소중한 인생을 끝장낼 명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고통은 사정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타인의 생명을 앗아간 죄를 덮어주는 방패가 될 수는 결코 없었다. 기훈은 무수한 붉은 불빛들이 허공에서 기괴하게 떠도는 환영의 공간에 다다랐다. 112 신고 접수 내역, 병원의 응급 진료 기록, 불안에 떨던 이웃의 제보, 학교의 상담 일지, 가족들의 간절한 호소문.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위협들. 수많은 위험 신호들이 공중에서 붉은 경고등이 되어 삐걱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경고 신호가 울리고 있었단 말인가?" "경고는 늘 사이렌처럼 울리고 있었지." 허공 어딘가에서 서늘하고 아득한 울림이 돌아왔다. "그런데 왜 아무도 미리 움직이지 않았지?" 문제는 경고음의 부재가 아니었다.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도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견고한 관료주의와 시스템이 문제였다. 경찰은 권한의 한계를, 기관은 복잡한 절차를, 전문가들은 미비한 기준을, 행정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대며 미루는 사이, 그 신호와 신호 사이의 벌어진 틈새로 힘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안전한 사회란 범죄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우토피아가 아니었다. 위험의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을 때 즉시 시스템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회, 작은 신고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시민의 불안을 심각하게 들어주는 사회였다. 49재의 마지막 날 밤, 기훈은 마침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의 빈 의자. 기훈은 그 의자 앞에 서서 가만히 손을 뻗어 보았으나, 여전히 손끝은 차가운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아내가 빈 의자로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불렀다. "여보..." "나 여기 있어. 당신 곁에 있어... 미안해, 혼자 두어서 정말 미안해." 기훈이 애원하듯 속삭였지만, 그 목소리는 차가운 공기 속에 녹아내릴 뿐 아내에게 닿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나온 막내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으며 물었다. "엄마, 아빠는 이제 어디 간 거야?"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아이의 작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눈물을 참아내는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좋은 곳에... 아주 좋은 곳에 갔을 거야." 기훈은 씁쓸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웃었다. 사람이 죽은 뒤 가장 두려운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라, 자신이 빠져나간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남아 있는 자들의 삶이었고, 그들은 슬픔을 딛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도시의 아파트 창문마다 따뜻한 주황빛 불빛들이 하나둘 켜져 있었다. 수많은 가족들이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일이 당연히 올 것이라는 무던한 믿음,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누려야 할 가장 크고 성스러운 축복이었다. 오늘도 누군가는 무사히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누군가는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그 생과 사의 갈림길은 단 몇 초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몇 초의 비극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세심한 주의와 시스템의 즉각적인 작동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가 평범한 아빠와 시민에게 목숨을 걸고 의자를 들어 범인과 맞서라고 요구하는 '영웅'이 되기를 강요해서는 안 되었다. 시민의 무모한 용기가 안전망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사회는, 여전히 위태롭고 비겁한 사회였다. 새벽빛이 푸스스하게 밝아오자, 기훈은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저 멀리서 아득한 빛이, 지난날의 붉은 경고음들을 감싸 안으며 길을 비추었다. 기훈은 아내와 아이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안방 창가를 마지막으로 아련하게 돌아보았다. "잘 살아. 나 없어도... 서로 지켜주며 꼭 잘 살아라."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새벽바람을 타고 따뜻하게 흘러들어 아내의 귓가를, 아이들의 이불깃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훈은 이제 그 남아 있는 몫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맡긴 채,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승에는 다시 평범하고도 귀한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도로 위로 버스가 달리고, 식당에서는 구수한 찌개가 끓어오르고,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서로에게 무심히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에 늦어?" "아니, 일찍 끝나요. 금방 갈게." 그 무심하고 평범한 한마디가 얼마나 간절하고 귀한 생명의 약속인지, 사람들은 여전히 다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하지만,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온기 어린 관심, 그리고 제도의 철저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정겨운 집을 향해 걸어간다. 부디 모두가 무사히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기를. 사람이 죽고 난 뒤에야 뒤늦게 슬퍼하고 후회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세상이 되기를. 어둠 속으로 무심히 사라져 간 기훈의 마지막 바람처럼, 그 작은 경고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 어딘가에서 나지막이, 그러나 간절하게 울리고 있었다. 책 한 권을 곁에 두시거나 짧은 리뷰 한 줄의 따뜻한 관심은 제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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