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

선을 긋다가 연결을 배웠다

10월 17일 | 조회수 179
버
버마짝귀

헛똑똑이가 현 직장에 입사했을 때, 글로벌사업부는 막 설립된 상태였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조직이다 보니 정해진 업무 프로세스가 부족했습니다. 각 부서의 업무가 서로 연결되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헛똑똑이는 누군가 기준을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거나, 일단 눈앞의 일을 처리하며 문제를 회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전 직장에서 경험했던 업무 프로세스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잘 운영되고 있던 프로세스였으니, 지금 회사에도 적용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 직장의 업무 프로세스를 기준으로 각 부서의 역할과 책임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우리 일이 아니고, 저쪽 부서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업무는 우리 부서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업무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선을 그었다고 해서 그 사이에 놓인 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대표적인 것이 해외법인과 본사 간의 업무였습니다. 해외법인의 판매예측을 검토하고 생산계획을 수립하는 일부터 국가별 비관세장벽 검토, 최종적인 해외 출고까지 여러 부서가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업무마다 소통하는 경로가 제각각이었습니다. 해외법인이 글로벌사업부를 거치지 않고 각 부서와 직접 소통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주고받은 정보가 글로벌사업부에 공유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각 부서는 맡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전체 업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헛똑똑이는 처음에 전 직장의 프로세스를 기준으로 각 부서의 역할을 나누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의 업무인지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흩어진 정보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은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부서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절차가 필요한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는지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헛똑똑이는 전 직장의 프로세스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었던 것은 업무의 순서와 담당 부서였을 뿐, 그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이유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부서의 기능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전 직장의 기획 부서가 왜 필요했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세스를 따라 하는 것과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낯선 경험도 아니었습니다. 헛똑똑이는 해외영업을 하면서 거래처 MD의 KPI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지 알아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 부서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기보다, 먼저 누구의 업무인지부터 구분하려 했습니다. 회사 밖에서는 상대방의 목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회사 안에서는 상대방의 업무에 선부터 긋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업무를 들여다보면서 3년 전부터 조금씩 개선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업무를 개선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고, 별도의 프로젝트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각자 반복적으로 처리하던 업무를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우리, 이 일에 쓰는 시간을 좀 줄여봅시다.” 그때부터 서로의 업무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자료를 보내고 취합하던 일을 다시 검토하고, 기존의 절차가 정말 필요한지 함께 고민했습니다. 전 직장의 프로세스를 다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함께 일하는 부서들의 기능과 상황에 맞는 부분을 찾아 적용하고, 맞지 않는 부분은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선을 이어왔고, 2년 전부터는 조금씩 업무 방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함께 일하던 동료 중 퇴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퇴사 이유 중 하나는 업무 개선에 쏟는 노력이 개인의 KPI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회사가 평가하는 성과와 개인이 업무를 통해 느끼는 성취감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남은 실무자들은 개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업무를 이해하면서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성취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공백을 메우며 업무를 개선해 나갔습니다. 지금은 함께 개선해 온 업무의 R/R도 이전보다 명확해졌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일을 처리하는 데 예전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간혹 다른 부서의 책임자가 바뀌면서 새로운 업무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이 업무가 어느 부서의 일인지부터 따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우선 당면한 업무를 처리하고, 함께 일하는 실무자들과 그 업무가 정말 필요한지 검토합니다. 불필요한 업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정식으로 개선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과정마저 헛똑똑이에게는 작은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처음에는 업무의 경계를 명확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누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만 정해지면 일이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업무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서로의 경계를 나누었을 때가 아니라, 그 경계 너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시간을 줄여보자는 작은 목표가 생기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헛똑똑이는 업무의 경계를 정하려다가,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아직 개선해야 할 업무는 많이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개선은 곧 성장을 의미하니까요.

댓글 0개
공감순
최신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
추천글
대표전화 : 02-556-4202
06235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134, 5,6,9층
(역삼동, 포스코타워 역삼) (대표자:최재호, 송기홍)
사업자등록번호 : 211-88-81111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2016-서울강남-03104호
| 직업정보제공사업 신고번호: 서울강남 제2019-11호
| 유료직업소개사업 신고번호: 2020-3220237-14-5-00003
| 국외 유료직업소개사업 신고번호: F1200020240004
Copyright Remember & Compan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