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는 대기업에서 5년 차 품질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해외 고객사와 공급사 대응을 위해 출장을 다니기도 하고, 품질관리 업무를 하면서 나름의 전문성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처음부터 이런 길을 걸어온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저는 고졸이고 공부를 잘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학창 시절에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공부가 싫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독립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몇 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교차로 구인공고를 찾아봤습니다. '기숙사 제공' 그 조건 하나를 보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제 첫 직장생활이 시작됐습니다. 20대 초반의 저는 직업이나 직군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었습니다. 레스토랑 서빙도 했고, 물류센터 상하차도 했고, 콜센터에서도 일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해야겠다는 생각도 크지 않았습니다. 1년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월급 150만 원 정도를 받으며 몇 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20대 중반쯤 되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모아놓은 돈은 별로 없었고, 그렇다고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공부해서 대학에 갈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젊을 때 몸이라도 써서 돈을 벌어보자.' 그렇게 들어간 곳이 제조업 공장이었습니다. 2조 2교대 근무였습니다. 180℃ 정도 되는 고무 성형기 앞에서 고무패킹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면서 뜨거운 성형기에서 제품을 떼어냈습니다. 처음에는 손에 화상을 입고 물집이 잡히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목장갑을 세 겹씩 끼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손의 살이 벗겨지고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세 겹을 끼던 장갑이 두 겹이 되고, 나중에는 한 겹만 껴도 버틸 수 있게 됐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월급날은 달콤했습니다. 당시에는 월급이 600~700만 원 정도 찍히면 '이번 달도 버텼다'는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조는 작업자 대부분이 외국인이었고, 한국인은 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셨는지 공장장님께서 어린 저에게 조장을 맡겨주셨습니다. 성형기 앞에서 제품을 떼어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작업자들의 생산량을 확인하고, 초품·중품·후품 검사를 하고, 생산 목표가 끝나면 다음 제품의 금형을 교체하고, 설비 이상이 생기면 해결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단순히 몸을 쓰는 일을 넘어 생산 전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나, 공장에서 일하는 게 생각보다 잘 맞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 년을 2조 2교대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혈색도 좋지 않았고, 눈도 늘 피곤했고, 피부도 많이 상했습니다. 주변에서도 걱정스러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돈도 중요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돈을 벌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직을 결심했습니다. 이번에도 제조업이었습니다. 다만 교대근무가 아닌 상주근무였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설비와 금형을 다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업무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다가 9시간 근무를 하게 되니 퇴근하고도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만드는 제품의 소재와 관련된 자격증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를 따고 나니 또 욕심이 생겼습니다. 중장비, 산업안전 등 여러 자격증을 하나씩 공부했습니다. 자격증을 하나 취득할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자격증이 10개 가까이 쌓였습니다. 회사에서도 자격증을 활용해 각종 선임을 맡게 되면서 급여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품질팀장님에게 제안을 받았습니다. 생산에서 품질관리 업무로 부서를 옮겨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품질이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SPC, Audit, ISO 인증, KS 인증, 검교정, 보증 업무, 개선활동 등을 하나씩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장도 많았고, 심사 준비를 하면서는 서류와 현장을 준비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습니다. 준비한 것이 잘되지 않으면 상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약 4년의 품질 경력을 쌓고 어느 날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학력은 여전히 고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은 10개가 넘었고, 품질관리 경력도 4년 이상 쌓여 있었습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지역의 여러 중소기업 품질 담당자들이 모이는 교류회에 참석했습니다. 식사와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 경력이나 하고 있는 업무에 비해 현재 회사의 처우가 다른 회사들과 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몇몇 분들은 저에게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해주셨습니다.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현재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이 정도 경력이면 한번 도전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서류 몇 군데 넣어보는 게 손해 볼 건 없겠지.' 처음으로 대기업에 지원했습니다. SK, 포스코를 비롯해 몇 곳에 지원했고, 결과는 운 좋게도 대부분 서류와 인적성에서 합격했습니다. 처음 경험해보는 대기업 면접이었습니다. 지역과 근무환경 등을 고민하면서 신중하게 선택했고, 최종적으로 두 곳의 면접을 봤습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합격했습니다. 연봉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와 복지, 앞으로의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현재 다니는 회사에 품질관리 직무로 입사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에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왜 '대기업, 대기업'이라고 하는지도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이전 회사에서는 두 명이 하던 일을 이곳에서는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누어 하고 있었습니다. 업무의 체계도 달랐고, 제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도 달랐습니다. 지금은 공급사 감사와 고객 대응을 위해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부딪히게 될 학력이라는 벽을 넘기 위해 학사 학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은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못했고, 20대 초반에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한때는 뜨거운 공장 안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작은 경험 하나가 다음 직장에서 도움이 되었고, 다음 직장에서 취득한 자격증 하나가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줬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쌓다 보니 지금의 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너무 일찍 자신의 가능성을 정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력이 부족하다고, 좋은 경력이 없다고, 지금 다니는 회사가 별로라고,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일단 일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라도 배우는 것. 시간이 생기면 자격증 하나라도 공부하는 것.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최대한 가져가는 것.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안 될 거야'라고 미리 포기하지 않는 것. 저는 그렇게 하나씩 움직이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처음부터 대기업을 목표로 했던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품질관리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때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쌓이고 연결되면서 지금의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대기업이 아니어도 괜찮고, 좋은 직장이 아니어도 괜찮고, 학력이 부족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보세요. 경험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과거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경험 하나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기회가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저 역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인생이 처음부터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내가 움직이고 있는 한 다음 기회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저의 이야기가 지금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 때문에 스스로를 작게 보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직/커리어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에게
09월 28일 | 조회수 70
나
나에대한고찰
댓글 0개
공감순
최신순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
추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