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제

추석명절 2

09월 23일 | 조회수 236
남지만작가

미완성이어도 괜찮아 올해도, 내년에도, 아마 그다음에도 결혼한 지 어느덧 25년. 세월이 강산을 두 번을 넘게 바꿔놓았는데, 추석만큼은 늘 그대로다. 명절 연휴가 흘러나올 때면 내 안에서는 어김없이 오케스트라가 울린다. '올해는 기필코!' 그 웅장한 교향곡이 시작되면, 나는 잠시 ‘가장’이라는 이름을 벗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며칠을 꿈꾼다. 모두가 잠든 전날 밤, 내 머릿속은 비밀스러운 계획들로 반짝인다. 책상 위에는 박경리의 토지. 몇 해째 펼치지 못했지만, 이번엔 꼭 읽어보겠다고 다짐한다. 보지 못한 영화, 듣지 못한 음악, 걸어보지 못한 길들이 내게 손짓한다. 그 짧은 상상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아침이 밝는다. 집안의 불이 하나둘 켜지고, 그 순간 모든 계획은 현실의 바람에 흩어진다. ‘아버지’, ‘남편’, ‘큰아들’이라는 이름이 조용히 나를 불러 세운다. 책 대신 예초기를 들고, 영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켠다. 힐링 음악 대신 들려오는 건 “부릉부릉”, “으쌰으쌰”, “요즘 회사는 어때?” 명상 대신 명령이, 트레킹 대신 마트와 휴게소가 내 일정을 채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모든 분주함이 미워지지 않는다. 연휴의 끝자락,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스며든다. 읽지 못한 책, 보지 못한 영화, 듣지 못한 음악들이 아쉽기보다는 이상하게 따뜻하다. 그 미완의 목록들이 내년을 향한 약속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음엔 꼭…” 그 한마디가 올해의 마침표가 된다. 나는 안다. 내년 추석 전날 밤, 또다시 똑같은 다짐을 할 것이다. “올해는 기필코!” 그리고 그 다짐이 또다시 무너져도 괜찮다. 이루지 못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니까. 해마다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품는 마음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으니까. 명절이 끝나고, 손에는 토지 대신 밀린 업무 서류가 들려 있지만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이 아쉬움이야말로 25년 동안 내가 지켜온 가장의 연례행사이며, 조용히 나를 숨 쉬게 하는 삶의 리듬이니까. 선생님의 추석은 어땠나요? 혹시 당신에게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만의 목록’이 있나요? 내년엔 그중 딱 하나만이라도 살짝 완성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린 또 한 해를 견딜 힘을 조용히 얻게 될 테니까요. -나는 채권관리사입니다 '6장. 추석명절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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