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최대의 적은 내면의 자만 - 스스로를 타도하라 오너가 대표가 아닌 직원출신 대표가 개혁 도요타가 변해야 국가가 변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 장착 First Mover로 프리우스 성공 ”도요타가 영원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요타 타도’라는 발상으로 개혁에 착수해 주길 바란다. 최대의 적은 ‘내면의 자만’이다.“ 이런 도요타도 테슬라 중국기업들에 전기차 자율주행에 밀린다 기업도 생노병사로 그 수명이 있다 한국 재벌들도 사라질 날이 온다 완장질과 갑질 범죄로 그 날은 앞당겨질 것이다 ____ “도요타를 타도하라” 전설의 경영자가 남긴 ‘자기혁신’의 경고[딥다이브] 한애란 기자 | 동아일보 2026.08.16. 오전 7:41 세계 1위 자동차 제조사는 일본 도요타죠. 하이브리드 전성시대를 맞이하며 사상 최고 실적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사실 과거 도요타는 ‘돌다리를 두드려도 건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지극히 보수적인 기업이었습니다. 그 체질을 바꾸고 변화에 속도를 내게 된 건 30여 년 전 오쿠다 히로시(奥田碩) 전 사장이 취임하면서부터였죠. ‘강한 도요타’의 상징인 오쿠다 전 사장이 8월 8일 별세하면서 그가 남긴 일화와 어록이 재조명되는데요. 30년 전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통하는 인사이트가 있습니다. ‘도요타를 세계 1등으로 끌어올린 경영자’ 오쿠다 히로시 전 사장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좌천은 도약의 기회다 도요타 본사 경리부에서 필리핀 마닐라 지점으로 발령. 1972년 가을, 오쿠다 히로시의 경력은 완전히 꼬인 듯했습니다. 회계처리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직급 안 가리고 거침없이 캐묻는 그 성질머리 탓에 상사에게 단단히 찍혀서 사실상 좌천당한 거죠.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필리핀 협력업체에 떼인 거액의 부품 대금을 받아내는 것. 협력업체가 배째라로 나온 탓에 전임자 누구도 성공해 내지 못한 일이었는데요. 하지만 그는 책상물림으로 숫자만 들여다보는 경리직원이 아니라, 현장으로 뛰어들어 담판 짓는 배짱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오쿠다는 일개 주재원 신분으로, 최고 권력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재계 인맥을 뚫었고요. 필리핀 대통령궁을 움직여서 대금을 회수해 내는 데 성공했죠. 마침 필리핀을 방문한 도요타 가문의 황태자, 도요타 쇼이치로 부사장이 오쿠다를 만나 이런 활약상을 확인하게 됩니다 .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했죠.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다!” 1979년 오쿠다는 일본 본사로 소환됐고, 이후 도요타 쇼이치로의 심복으로 승승장구합니다. 오쿠다 전 사장은 훗날 인터뷰에서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는데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운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곳을 찾아다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많은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노력한 자에게만 운이 따른다는 얘기죠. 도요타가 변하면 일본이 변한다 1995년 8월, 도요타 다쓰로 사장(도요타 쇼이치로 당시 회장의 동생)이 병으로 쓰러지자 그 자리를 오쿠다 히로시가 이어받았습니다. 도요타에선 28년 만에 도요타 가문이 아닌 비창업가문 출신 사장이 탄생한 거였죠. 오쿠다 사장의 취임 일성은 이거였습니다. “앞으로의 도요타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다.”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한 건데요. 그 시절 도요타는 여전히 품질 면에서 세계 1등이라 자부하는 자동차 제조사였지만, 성장세는 꺾인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내수시장 점유율은 30%대로 뚝 떨어졌고, 엔고로 수익성마저 악화됐죠. 당시 일본 경제는 버블 붕괴로 장기 불황에 빠지면서 자신감을 잃은 지 오래였고요. 도요타 내부엔 ‘이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다’라며 자족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요. 오쿠다 사장은 외부 환경을 핑계로 안주하는 도요타의 ‘대기업병’ 깨부수기 시작했어요.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겼죠. “도요타가 변하면 일본이 변한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19명 임원 중 무려 17명을 한꺼번에 바꾸는 세대교체를 단행합니다. 오너 일가 의중만 살피며 변화에 몸을 사려온 나이 많은 임원들을 자르고, 젊은 인재를 대거 발탁한 거죠.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은 오쿠다 사장의 특장점으로 꼽히는데요. 사장실의 ‘미결 서류함’에는 결재 서류가 남아있을 틈이 없었다고 하죠. 사내에선 ‘사장 책상 위 서류는 1분 만에 사라진다’는 말이 나왔고요. 엘리베이터를 타는 수십 초 동안에 부하가 보고한 계획을 결재했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전해집니다. 그는 “서툴러도 좋으니, 어쨌든 빨리 움직이기 시작하라”며 경영의 속도를 강조했죠. 그 결과, 신중하다 못해 느려터졌던 도요타의 해외 진출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고요. 미국 인디애나 공장과 웨스트버지니아 엔진 공장, 프랑스 발랑시엔 공장 건설이 속도감 있게 추진됩니다. 도요타의 글로벌화가 이때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죠. 무엇보다 오쿠다 사장은 도요타를 업계 리더로 올라서게 만드는 중요한 승부수를 던졌는데요. 바로 세계 최초 하이브리드 차량 ‘프리우스’의 조기 출시였습니다. 21세기에 맞춰 해냈습니다 1995년 10월 도쿄 모터쇼. 도요타 부스 한켠에 선보인 컨셉트카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진 못했습니다. 그 이름은 프리우스. 도요타가 ‘21세기용 승용차’ 프로젝트로 탄생시킨 내연기관과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차량이었죠. 전 세계 어느 자동차 업체에도 없던 신기술이었지만, 당시엔 그게 진짜 조만간 도로를 달릴 수 있으리라 본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개발 과정은 대단히 험난했어요. 같은 해 11월 개발팀이 프로토타입 차량 한 대를 조립했지만 도통 차가 움직이질 않았죠. “시제차가 처음 움직이게 하기까지 49일이 걸렸어요. 갑자기 움직인 건 아니었고, 컴퓨터도, 모터도 점차 개선됐죠. 모터로 5m를 움직이긴 했는데 엔진은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엔진은 시동이 걸렸지만 모터를 동시에 사용하려고 하면 멈춰 버리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나아졌어요. 덜컹거리며 움직였고 500m를 달린 뒤 다시 멈춰버렸죠.” (당시 개발을 맡았던 엔지니어 오기소 사토시의 회고글) 그런데 그해 말 개발팀에 날벼락 같은 일이 닥쳤으니.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쿠다 사장이 “프리우스를 1997년 안에 내놔야 한다”고 통보한 겁니다. ‘21세기용 차량이니까 어떻게든 힘내면 1999년쯤엔 출시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엔지니어들로선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죠. 실무진 사이에 “절대 무리”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오쿠다 사장은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미국 캘리포니아가 1998년부터 초강력 환경규제(무공해차 의무화)를 시행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이었고요. 1997년 12월 일본 교토에선 ‘제3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가 열릴 예정이었죠.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교토로 쏠리는 시점에 맞춰 프리우스를 출시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적자를 각오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2년 뒤인 1997년 12월 10일, 세계 첫 양산형 하이브리드차량 프리우스가 일본에서 출시됐습니다. 가격은 215만엔, 연비는 L당 28㎞이었죠. “21세기에 맞춰서 해냈습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초원 위를 달리는 프리우스의 광고는 큰 화제를 모았고요. 교토 COP3 행사장엔 프리우스가 배치돼 회의 참석자들을 태우면서 도요타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렸어요. “그렇게 복잡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 건가.” 당시 유럽 자동차 제조사의 최고 경영자가 이렇게 감탄했을 정도로 프리우스는 자동차 업계를 뒤흔드는 혁신이었습니다. 이로써 도요타는 글로벌 친환경 차량 경쟁에서 선두주자로 올라서게 됐어요. 이제 도요타의 글로벌 판매량 중 하이브리드차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30년 전 오쿠다 사장 시절의 무모했던 도전이 지금의 세계 1등 도요타로 이어진 셈입니다. 도요타를 타도하라 오쿠다 전 사장의 결단력이 탄생시킨 또 다른 도요타의 히트상품은 소형차 ‘야리스(옛 일본 내수 제품명은 ’비츠)’입니다. 전 세계 누적 판매량 1000만대를 돌파한 도요타의 글로벌 베스트셀링카인데요. 야리스는 젊은층과 유럽 시장을 겨냥해서 개발한 소형 해치백이었습니다. 하지만 1세대 야리스 디자인이 처음 사내에 공개됐을 때 임원들 사이에선 ‘이게 정말 팔릴까?’라는 우려가 많았어요. 기존 도요타 차와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던 데다, 계기판을 대시보드 한가운데로 옮긴 ‘센터 미터’도 파격적이었거든요. 이에 오쿠다 사장은 “이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차”라면서 망설임 없이 이를 승인했고요. 출시 직후 2000년 ‘유럽 올해의 차’로 선정됐을 정도로 대히트를 쳤습니다. 도요타의 포뮬러원(F1) 도전 스토리도 유명한데요. 1997년 6월 오쿠다 사장은 연구개발 거점인 히가시후지 연구소를 방문해 이런 질문을 불쑥 던집니다. “F1은 어때?” F1 참가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뿐만 아니라, 리스크가 상당히 큰 일이죠. 자칫 성적이 엉망이면 된통 망신당할 수 있으니까요.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도요타 사내 분위기상 F1 얘기는 일종의 금기에 가까웠는데요. 이걸 오쿠다 사장이 깬 겁니다. 이제 도요타도 세계적 레이싱 무대에서 실력을 검증받을 때가 됐다는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드러낸 거죠. 오쿠다 사장은 이렇게 말했어요. “F1 그랑프리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과 같은 면이 있습니다. 시대를 이끌어갈 힘이 있죠. 그런 것들이 이끌어가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합니다.” 1999년 1월 F1 참가를 공식 선언한 도요타는 2002년 데뷔전을 치렀고요. 한동안은 별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조롱당하기도 했지만, 2009년 시즌이 되자 잇달아 2위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후 금융위기 여파로 실적이 악화되면서 도요타는 2010년 시즌에 F1 철수를 결정) 오쿠다 히로시의 사장·회장 재임기간(1995~2006년)은 도요타의 극적인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기 도요타 연결 매출액은 2.5배로 불어났고요. 2008년, 마침내 도요타의 연간 판매대수가 사상 최초로 미국 GM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했죠. 하지만 그는 도요타가 잘나가던 시절에도 “도요타가 영원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조직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었어요. 2001년 그의 신년사엔 이런 내용이 담겼죠. “한 사람 한 사람이 경영자의 관점에 서서 ‘도요타 타도’라는 발상으로 개혁에 착수해 주길 바란다. 최대의 적은 ‘내면의 자만’이다. 변혁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도요타의 적은 도요타”라던 오쿠다 전 사장의 통찰. 사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인 모든 기업에 적용되는 말 아닐까요. 점점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요즘, 전설의 경영자가 남긴 어록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
이슈토론
[도요타 사례] 재벌의 최대적은 재벌: 재벌을 타도하라
08월 16일 | 조회수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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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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