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밤 2

05월 23일 | 조회수 96
어찌생각

그날 이후에도 남자는 여전히 아르카디아에 접속했다.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끝난 사람처럼 로그아웃하지는 못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사람 마음은 완전히 무너졌을 때보다 애매하게 남아 있을 때 더 오래 머무는 법이었다. 서버 17구역의 카페는 여전했다. 고장 난 간판, 비에 젖은 플랫폼, 벽면에 붙은 오래된 여행 포스터. 달라진 게 있다면 단 하나였다. 이제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으면 무의식적으로 맞은편 의자를 먼저 바라봤다. 그곳엔 늘 그녀가 있었으니까.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 창밖을 보며 조용히 웃던 사람. 그녀는 접속 빈도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가끔 새벽 두 시쯤 온라인 표시가 떴고,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비 온다.” 혹은 “잠이 안 와.” 남자는 그 짧은 문장들만으로도 심장이 이상하게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찾고 있었다. 다만 예전처럼 삶 전체를 기대듯 다가오진 않을 뿐이었다. 어느 새벽이었다. 남자가 카페 창가에 앉아 있을 때 플랫폼 입구 자동문이 열렸다. 익숙한 흰 코트. 그녀였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바라봤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둘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피커에선 느린 재즈 음악이 흘렀고, 창밖엔 인공 비가 떨어졌다. 그녀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말했다. “바닐라 라떼 아직 있나?” 남자는 피식 웃었다. “너 맨날 그거만 마셨잖아.” “사람 입맛 쉽게 안 변해.”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여기 자주 와?” 남자는 대답 대신 웃었다. “너야말로 아직도 접속하네.” 그녀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예전보다 훨씬 조용했다. 마치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요즘은 어때?” 그녀가 물었다. 남자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 같았고, 힘들다고 하면 그녀를 붙잡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냥… 적응 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짧은 대화였지만 그 말 안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직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예전처럼 달려갈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걸 둘 다 알고 있다는 것. 그날 그녀는 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 별 이야기 없었다. 새로운 여행 서버 이야기, 이벤트 후기, 최근 업데이트된 배경음악 이야기. 아주 평범한 대화들. 그런데도 남자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예전엔 늘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왜 연락 없었는지, 왜 멀어졌는지, 왜 자신만 더 아픈 것 같은지.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모든 관계가 반드시 처음 같은 온도로 남는 건 아니라는 걸. 새벽 네 시가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야겠다.” 남자는 무심한 척 물었다. “다시 올 거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웃었다. “아르카디아 안 망하면?” “그럼 계속 오겠네.” “글쎄.” 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플랫폼 쪽으로 걸어갔다. 자동문이 열리기 직전, 그녀가 잠깐 뒤돌아봤다. “있잖아.” “응?” “네가 아직 여기 있어서… 가끔은 다행이야.” 문이 닫혔다. 남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밖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카페 안은 조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외롭진 않았다. 사라지는 관계도, 멀어지는 사람도, 어쩌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서로의 세계 가장자리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남게 되는 것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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