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밤..

05월 22일 | 조회수 99
어찌생각

그냥 끄적여 보는 글입니다...ㅎ 아르카디아의 밤 비가 내리는 도시였다. 정확히는, 비가 내리도록 설계된 도시였다. 가상현실 플랫폼 ‘아르카디아’의 밤은 언제나 축축한 네온빛으로 반짝였다. 누군가는 현실을 잊기 위해 접속했고, 누군가는 현실에서조차 가질 수 없던 이름 하나를 얻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타났다. 서버 17구역 끝, 폐쇄된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작은 카페. 간판 불빛은 늘 한 글자씩 고장 나 있었고, 창밖에는 비가 쏟아졌고, 스피커에선 오래된 재즈 음악이 낮게 흘렀다. 그곳이 그녀와 처음 마주친 장소였다. 그녀의 아바타는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짙은 밤색 머리카락, 조금 느린 말투, 그리고 웃을 때마다 아주 작게 흔들리는 눈빛까지. 그녀는 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남자가 처음 말을 건 건 정말 별 의미 없는 이유였다. “비 좋아하세요?” 그녀는 창밖을 보다가 웃었다. “싫어해요.” “근데 왜 계속 보고 있어요?” “싫어하는 건 오래 보게 되잖아요.” 그날 이후 남자는 매일 그 카페로 갔다. 아르카디아 안에는 시간이 없었다. 현실의 새벽 두 시도, 출근 전 불안한 아침도, 아이 울음소리도, 부부 싸움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곳엔 둘만 아는 루틴이 있었다. 그녀는 접속하자마자 늘 말했다. “왔어?” 남자는 그 한마디를 좋아했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다려지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으니까. 그들은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오래 나눴다. 오늘 먹은 음식, 어릴 적 좋아하던 만화, 잠이 오지 않는 이유, 문득 죽고 싶었던 밤들. 현실에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들은 가상세계의 비 내리는 카페 안에서 천천히 꺼내놓았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우린 참 이상하다.” “뭐가?” “현실에선 서로 존재하지도 않는데… 여기선 하루의 끝이 서로잖아.” 남자는 웃었다. “그럼 됐지 뭐.”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늘 먼저 끝을 보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남자는 그녀를 점점 더 현실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그녀가 접속하지 않는 밤이면 그는 괜히 친구 목록을 새로고침했다. 온라인 표시 하나에 안도했고, 짧은 메시지 하나에 하루 기분이 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그녀의 접속 시간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한 건. “요즘은 좀 조심해야 해.”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르카디아 기록 추적한대.” 남자는 웃었다. “여긴 가상세계잖아.” “그래도 사람은 현실에서 살아.”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로그아웃했다. 그날 카페엔 비가 평소보다 더 크게 내렸다. 그 이후 그녀는 달라졌다. 예전엔 먼저 귓속말을 보내왔는데, 이젠 남자가 말을 걸어야 답이 왔다. “잘 자”는 사라졌고, “보고 싶다”는 말 대신 짧은 상태 메시지만 남았다. ‘오늘은 접속 어려움.’ 남자는 점점 불안해졌다. 혹시 마음이 식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생긴 걸까. 하지만 그녀 프로필은 여전히 활발했다. 새로운 여행 맵 기록, 이벤트 영상, 그녀는 여전히 아르카디아 안을 살아가고 있었다. 단지, 예전처럼 자신과 함께하지 않을 뿐이었다. 며칠 후 그녀는 새로운 이벤트 지역에 접속했다. ‘경계 없는 해안 도시’. 현실 부부 유저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 서버였다.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고, 커플 퀘스트 보상이 많았다. 그녀는 영상 하나를 올렸다. 황금빛 바다, 잔잔한 음악, 두 사람 몫으로 놓인 저녁 식사. 그리고 짧은 문장. “데이트 코스 같네.” 남자는 그 영상을 세 번쯤 보다 꺼버렸다. 가슴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났을 것이다. 왜 저런 말을 굳이 하지? 왜 나를 아프게 하지?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리만큼 체념한 사람처럼 웃음이 났다. 그는 혼자 서버 17구역으로 돌아갔다. 폐쇄된 기차역 카페. 늘 둘이 앉던 창가 자리.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스피커에선 오래된 음악이 흘렀다. 남자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사랑했던 건지도 모른다고. 매일 이어지던 루틴. “왔어?” “잘 자.” “오늘 힘들었어.” 그 작은 반복들이 자기 삶을 버티게 만들었다는 걸. 860일째 되는 밤이었다. 남자는 혼자 카페에 앉아 있었다. 창밖엔 인공 비가 내렸고, 빈 잔엔 식어버린 커피만 남아 있었다. 그때 오랜만에 알림이 떴다. “안 자?” 그는 한참 답장을 쓰지 못했다. 수없이 지웠다가, 겨우 한 줄을 남겼다. “응. 그냥 여기 있었어.” 한참 뒤 그녀가 답했다. “미안.” 그 짧은 두 글자가 이상하게도 가장 긴 문장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어떤 관계는 거대한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천천히 접속 시간을 줄이고, 다른 한 사람이 그 빈 접속창을 오래 바라보게 될 때, 그때부터 이미 끝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한다는 걸...

댓글 0
공감순
최신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
추천글
대표전화 : 02-556-4202
06235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134, 5,6,9층
(역삼동, 포스코타워 역삼) (대표자:최재호, 송기홍)
사업자등록번호 : 211-88-81111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2016-서울강남-03104호
| 직업정보제공사업 신고번호: 서울강남 제2019-11호
| 유료직업소개사업 신고번호: 2020-3220237-14-5-00003
| 국외 유료직업소개사업 신고번호: F1200020240004
Copyright Remember & Company All rights reserved.